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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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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순은 영원한 클래스다

학벌과 어학 능력 출중한 뇌섹남여 앞에 나타난 <무한도전> 바보 어벤저스의 뇌순남여들
등록 2015-10-24 14:32 수정 2020-05-03 04:28

뇌섹이 시끄럽다. 같은 토크쇼에서 멋진 생각을 똑 부러지는 말솜씨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는다. 같은 게임쇼에서 복잡한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이들이 박수갈채를 받는다. 그들의 똑똑함이 얼짱·몸짱 이상의 성적인 매력까지 뿜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똘똘이 스머프가 섹시 스타가 되는 시대가 온 걸까? 의 바보 어벤져스가 말한다. “띠리리리리~ 그거 아닌데!”
처음 뇌섹의 매력을 선보인 건 미드의 두뇌파 주인공들이었다. 의 닥터 하우스, 의 탐정과 범죄자들, 의 패트릭 제인 등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지능과 말솜씨로 우리를 매혹했다. 국내에서는 종합편성채널 토크쇼가 붐을 이루면서 똑 부러지는 자기 생각을 가진 출연자들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어 등 두뇌게임형 예능들이 짜릿한 재미를 만들어냈고, 지능파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 기회를 얻었다.
하나 뇌섹남이 ‘뇌가 섹시한 남자’를 일컫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들 대부분은 가수·배우 같은 연예인이니까 기본적으로 매력적인 외모를 장착하고 있다. 거기에 고학력, 외국어 실력, 퀴즈 풀이 능력 같은 스펙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똑똑해서 잘생겨 보여”라기보다는 “잘생겼는데 똑똑하기까지 하네”에 가깝다. 뇌섹녀는 이것과도 좀 다르다. 의 카이스트 재학생 윤소희, 의 서울대 공대여신 최정문, 등의 MC를 맡고 있는 하버드대 출신의 MC 신아영 등은 뛰어난 두뇌보다는 섹시한 몸매가 강조된다.
뇌섹은 뇌만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뇌도 되고 섹시도 되어야 한다. 남자는 뇌가 먼저이고, 여자는 섹시가 먼저다. 사실 우리는 이들을 얼마 전까지 다른 말로 불렀다. 엄친아와 엄친녀다. 만약 뇌섹이 대세라면 연예인들도 스카이(SKY) 학력과 멘사 회원증과 어학 능력이라는 스펙 경쟁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리의 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준다. 그들은 뇌섹의 분탕질에 맞서, 뇌순남·뇌순녀들을 소환하고 있다.
TV는 바보상자다. 시청자를 바보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바보가 주인공이 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분장하며 재현하는 위대한 바보들의 역사를 보라. 비실이 배삼룡은 뚱뚱이 구봉서에게 굽실대는 바보 각설이다. 그는 가난해서 못 배웠고 배가 고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부자들의 약삭빠른 술수에 넘어가버린 민초들의 자화상이다. 심형래는 ‘변방의 북소리’ ‘내일은 챔피언’ 등에서 넘어지고 얻어맞으며 시청자의 가학적 쾌락을 받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또 바보짓을 빙자해 권력자인 장수를 두드려패기도 한다. ‘봉숭아학당’의 맹구는 아예 자아도취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바보라서 행복해버린다.

<무한도전>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무한도전> 페이스북 페이지 갈무리

의 바보 어벤져스는 TV 프로그램에서 엉뚱한 맞춤법, 부족한 상식을 들키고 만 흑역사의 주인공들이다. 한때 그들은 그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덮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 그들에게 커밍아웃할 기회를 준다. 간미연이 ‘Rose’ 철자를 몰라서 ‘Lose’로 썼다고 쿨하게 인정하니 할 말이 없다. 그래, 모두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하고, 사자성어를 줄줄 외워야 하나? 심형탁(사진)이 도라에몽에 너무 빠지는 바람에 상식 부족으로 삶이 위태해졌나? 사실 그들은 영리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밉지 않은 바보가 되는 것만큼 TV에서 훌륭히 살아남는 방법은 없다. 뇌섹은 마케팅 용어이고, 뇌순은 영원한 클래스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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