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센스의 (The Anecdote) 발매 이틀 전, 음악 관계자들을 초대해 가진 조촐한 음악감상회가 있었다. 앨범 감상 전에 제작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는데 거기에서 이센스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데뷔한 느낌이거든요. 커리어 이제 막 시작하는 느낌이에요. 그 전까지는 학생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학생 중에 등수가 좀 높으니까 장학금을 받았다고 생각하려고요.” 이센스의 경력이나 실력으로 볼 때 이는 무척이나 겸손한 표현이지만 가 이센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는 건 분명하다.
대구 출신의 재능 있는 래퍼. 라는 믹스테이프를 발표하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 재능을 진작 알아챘던 다이나믹 듀오 개코의 지원을 받으며 슈프림팀으로 주류 가요계에서 활동하다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을 알린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활동한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만큼 많은 ‘스토리’를 가진 음악가는 흔치 않다. 지금 모든 힙합 커뮤니티가 온통 그와 얘기로 넘치고, 발매와 동시에 1만6천 장이라는 놀라운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건 지금껏 이센스라는 래퍼가 거쳐온 삶의 굴곡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 로 대표되는 편향된 이미지들과 함께 왜곡되게 전달되고 있는 한국 힙합을 바로잡아줄 구원자나 수호자로서 이센스에게 걸고 있는 ‘기대’도 있었다. 2년 전 음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개코와의 디스전에서 “내 얼굴에 떡칠해놨던 메이크업 다 씻어내는 데 걸린 시간 아무리 짧게 봐도 2년”이나 “그래서 그 짓거리 내가 좋아한 것 같냐/ 내가 어떤 맘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처럼 주류 시장에 들어가 실망스런 결과물만을 내놓았던 슈프림팀 시절을 스스로 부정하는 구절이나, 또 일찌감치 를 들었던 이들이 내놓은 ‘한국의 (Illmatic·나스가 발표한 미국 힙합을 대표하는 명반)’이란 평가는 그 기대를 한층 더 높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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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는 그 높아진 기대마저 완벽하게 충족한다. 는 지금 한국에서 발표되는 힙합 앨범들의 그 어떤 공식도 따르지 않는다. 잡화점처럼 각 트랙마다 프로듀서를 달리하고, 또 각 트랙마다 게스트 래퍼를 참여시키는 방식은 에 없다. 유행하는 트랩 비트도 없고, 돈 자랑, 여자 자랑을 하는 자기과시 가사도 없다. 는 덴마크 출신 프로듀서 오비 클라인 한 명이 앨범의 모든 비트를 만들었고, 이센스는 ‘일화’ ‘개인적 진술’이라는 뜻을 가진 앨범 제목에 맞게 자신이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랩으로 풀어냈다. 앨범 표지에 쓰인 KMH는 본명 강민호의 이니셜이다.
이센스는 강민호가 겪어온 이야기를 놀라운 래핑으로 표현해낸다.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진솔한 이야기는 랩 가사가 줄 수 있는 멋과 매력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 이야기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랩이 되어 비트와 하나가 된다. 이 서사는 랩뿐만 아니라 사운드에도 존재한다. 오비가 만들어낸 둔탁한 비트는 앨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을 갖고 유려하게 흐르며 마지막 곡 (Unknown Verses)의 사운드 풍경과 함께 감동적으로 마무리된다. 앞서 말한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덴마크의 밤거리에서 이센스는 담배를 줄여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앨범을 낼 거야.” 이센스는 정말 멋진 ‘앨범’을 만들어냈다.
김학선 음악평론가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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