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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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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우리의 서부!

가장 허무한 것과 치열한 것이 만나 폭발하는 ‘서부’라는 꿈의 공간, 그리고 <암살>이 발견한 ‘꿈의 공간’ 1930년대 중국
등록 2015-08-07 16:41 수정 2020-05-03 04:28
쇼박스 제공

쇼박스 제공

‘서부’는 꿈의 공간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것을 도대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거치지 않았던 과거고 도래할 리 없는 미래다. 그런데도 정말 또 현실 같다. 의 책장 뒤나 의 장난감 세계와는 다른, 꼭 진짜 같은 판타지인 것이다. 서부는 그래서 아름답고 쓸쓸한 도피처다. 직장에서 이번 건도 무사히 지나갈까 고민하고 내가 벌레처럼 싫어하는 인간 앞에서 내가 혹시 벌레처럼 싫어한다는 티를 무심코 내버렸으면 어쩌나 찜찜하게 되짚어보는 비루하고 또 비루한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저 애리조나 선인장이 있는 황량한 사막으로 단숨에 보내준다.

지평선에 시루떡처럼 자른 지층의 넓적한 바위산들이 듬성듬성 있고 모래바람이 이는 사잇길을 달려가면 술집과 이발소, 숙박업소 등을 가건물처럼 몇 채 세워놓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외톨이 떠돌이인 ‘나’는 그저 지나는 길일 뿐이지만 마을의 악당들과 연약한 양민들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고는 목숨을 건 혈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싸움이지만 결국은 내 명예, 내 실존적 과제를 두고 피 흘리는 것이다. 눈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인위적 손길이 안 느껴지는 거친 자연, 동물과 분간이 안 가게끔 묘사되는 적들, 뿌리치고 싶으나 뿌리칠 수 없게 연약한 마을의 저 무리들과, 나의 분투를 낱낱이 알아주는 멋진 이성, 그러나 추호의 미련도 없이 표표히 떠나는 나.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서부영화는 우리의 가장 센티멘털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동물적이고 유치한 면모를 다 끌어모아 영웅적인 건맨의 모습으로 돌려준다. 서부는 과연, 가장 허무한 것과 가장 치열한 것이 만나 폭발하는 현장이다.

나는 왜 태어나본 적도 없는 시간과 실제 존재한 적도 없는 공간, 그리고 겪어본 적도 없는 성별의 이야기를 이렇게 좋아하고 열광하는 걸까 다소 창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세계 영화팬들이 공통의 고향으로 그리워하는 그 서부가 전설로나마 다른 나라 소속이라는 게 찜찜했는데, 이번에 에서 우리의 서부를 만났다. 바로 1930년대 중국이다. 하와이 피스톨이 그윽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가 대의와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주인집에 예를 갖추려는 영감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그곳. 목숨과 신념을 걸고 벌이는 투쟁의 거리 건너에는 아름다운 남녀로 흥성거리는 댄스홀과 바가 있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라는, 전세계 온갖 스파이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세계의 정치 중심지 중 하나였다던 도시, 그래서 가장 화려하고 첨단적이고 가장 의로운 것이 가장 비루하고 낙후하고 잔혹한 것과 함께 공존했던, 꺼풀꺼풀 겹겹마다 다른 색채와 생활이 서려 있는 상하이라는 세계, 거기에서 “물어뜯지 못하려면 짖지도 말라”는 뼈아픈 비아냥과 “부랄을 깐 돼지는 적들이 먹기만 좋다”는 일갈이 부딪치며 건맨들이 운명을 겨루는 최적의 판타지 공간을 만들어낸다. 더군다나 여기서의 쓸쓸한 주인공 총잡이는 바로 여자 아닌가! 분명히 짧은 머리였는데도 긴 머리의 그녀가 라이플을 들고 분사하는 장면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을 심어줄 정도로 전지현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위치타가 아닌 상하이에서, 툼스톤이 아닌 경성에서, 모뉴먼트밸리가 아닌 만주 벌판에서, 건맨이 아닌 건우먼이 벌이는 총격전은 완전히 새로운 레벨의 판타지를 심어주었다. 1930년대 상하이라는 영화적 공간의 힘을 확실히 보여준 것만으로도 나에게 은 큰 충격이고 기쁨이었다.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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