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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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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건 종이와 샤프, 물감뿐

시간 날 때마다 날 닮은 만화를 그려요, 삶의 어떤 순간도 쓸모없이 여길 수 없게 돼요
등록 2015-07-17 16:51 수정 2020-05-03 04:28

재미있는 일의 아주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어야 할 것.
아무도 안 시켰는데 굳이 꼭 하고 싶다면 그것은 분명 재미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나에겐 미국 드라마 을 정주행하는 것이 그러하다. 혼자 코인노래방에 가는 것도 그러하며 마트에서 돼지고기 앞다릿살을 사와서 숙주와 굴소스를 넣고 볶은 뒤 청하를 곁들여 먹는 것도 그러하다. 글래머러스한 우리 엄마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도 그러하고 남자친구랑 연극 대본을 읽으며 열연을 하는 것도 그러하다. 또, 만화를 그리는 것도 그러하다.

이슬아 제공

이슬아 제공

엉덩이를 육덕지게 그릴수록 속이 시원

세상엔 이미 훌륭한 만화들이 차고 넘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출중한 만화가들이 좋은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 만화를 그리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화를 그린다.

나의 만화 시리즈에는 나와 거의 똑같이 생긴 여자애가 등장한다. 짧은 커트 머리를 한 그 여자애는 엉덩이가 크고 허벅지가 통통하다. 그녀가 주요 등장인물인 이유는 안타깝게도 내가 자신 있게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다. 나를 그리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선이 필요하지 않다. 우선 찐빵 같은 동그라미 안에 눈·코·입을 심심하게 그려넣은 뒤 머리는 아무렇게나 색칠한다. 그 아래에는 옷걸이 모양의 어깨선과 보일락 말락 한 젖꼭지 두 개를 그린다. 여기부터가 중요한데 가는 허리가 시작되자마자 골반 선을 과감하게 그려야 한다. 이 골반 부분은 정말이지 마음껏 과장되게 그려도 좋다. 먹는 게 다 엉덩이와 허벅지로 가서 저장되는 인간처럼 충분히 육덕지게 그릴수록 속이 시원해진다. 그 아래엔 튼실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그린 뒤 작은 손발을 슥슥 추가하면 완성이다. 쉽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캐릭터가 완성된 다음엔 그녀에게 움직임과 표정을 불어넣는다. 그러고는 말풍선을 그린다. 캐릭터에게 무슨 말을 하게 만들지 정하는 건 아주 어렵고도 재미있는 일이다. 내 만화 속에서 그녀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치약을 도둑질하고, 알몸으로 낮잠만 하루 종일 자고, 실연당한 친구를 놀리고, 무심한 애인을 기다리다가 소파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혹은 애인이 두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다가 혼자 감자탕을 먹으러 가거나 유치해서 참을 수 없는 친구의 자작곡을 들으며 표정이 짜게 식는다. 대부분 어리석고 구질구질한데 왠지 싫어하기는 힘든 모습이다. 이야기를 쓰거나 그리는 동안에는 삶의 어떤 장면도 쓸모없이 여길 수 없게 된다.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후 나는 사는 게 조금 더 재밌어졌다.

왜 야한 그림만 그리냐, 빨리 다음 편 올려라

요즘 그렇게 그린 만화들을 ‘이슬아의 ’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나의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하릴없이 타임라인 스크롤을 내리고 있던 사람들은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나의 삐뚤빼뚤하고 엉성한 만화를 구경한다. 누구는 왜 야한 그림만 그리냐고 타박하고 누구는 빨리 다음 편을 올리라고 한다. 현실 속의 나와 내 친구들을 너무 닮아 있는 만화를 보며 이게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이냐고 묻는 사람도 많은데 그때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모두 픽션이라고 대답한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완벽한 논픽션 같은 건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만화 그리면서 논다고 대답한다. 이 놀이에 필요한 것은 종이와 샤프와 물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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