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유명한 19세기 영국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좀 덜 알려진 소설 에는 헨처드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런 사람도 시장을 하는구나 싶은, 정말 별 볼일 없고 제멋대로며 유치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좋아해도 무조건적으로 좋아했고 누군가를 미워해도 참으로 열정적으로 미워했다. 매번 별 이유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마을에서 무슨 일로 큰 오해를 받고는 슬픔과 절망을 느끼며 아예 모두를 떠날 결심을 하는데 그 유언장이 걸작이다. 첫째, 아무에게도 내 죽음을 알리지 말 것. 둘째, 아무도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 것.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내 손발은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냥 어디 멀리 가서 혼자 조용히 죽으면 소원대로 될 걸 왜 이런 유언장을 굳이… 이건 만인에게 ‘내 죽음을 꼭 알려주세요, 모두 슬퍼해주세요’라고 대놓고 쓰는 것보다 더 심한데. 불안하게 읽던 나는 다음 줄에서 제대로 다시 한 방 맞았다.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말 것 -헨처드.” 아이고… 날 기억하지 말라고 굳이 유언을 하는 것도 신파스럽지만 거기다 자기 이름을 쓰는 건 또 뭔지! 말은 잊혀지고 싶다면서! 하지만 속보임에 대한 비웃음이 가시고 나자 나를 찾아온 건 미련이 많은 그에 대한 마음 아픈 연민이었다. 절대 잊혀지기 싫어하는 이 사람. 기억되고 싶어 하는 이 사람. 나라도 기억해주지, 뭐. 나의 포털 아이디는 그래서 헨처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감히, 기억으로 산다고 하겠다. 사람은 기억의 총합이라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때론 생존의 본능보다 앞서는 것이 기억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이 멸망한 땅을 달리며 초반, 맥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의 본능은 단 하나, 오로지 생존 그 자체로 축소되었다고. 거친 사막에서 내뱉은 비장한 목소리는 그러나 곱씹을수록 반감이 들었다. 저런 젖공장에서 일해도 혹은 피주머니로 살아도 살아남는 것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비루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에게도 마음은 잘 가지 않았다. 뭘 또 힘들게 탈출하려고 하니. 가봤자 필시 별 볼일 없을 텐데. 임모탄의 체제 안에서 그래도 괜찮은 위치를 가졌잖아, 너넨 그냥 있지 그래. 어느 쪽 인물들에게도 마음이 뺏겨지지 않으니 현란한 미술과 액션도 내 머릿속에선 따로 놀고, 저 기타리스트는 원래 기타를 치던 사람인데 전쟁에 차출된 걸까 아니면 보직이 저거라서 훈련을 쌓은 걸까 하는 등의 쓸데없는 생각이 오락가락하는데, 그러는 사이 마음은 눅스라는 청소년에게 흘러갔다. 덩치는 크지만 여전히 속으론 무서움 많은 어린애라 엄마 같고 아빠 같은 누군가를 믿고 싶고 무언가 절대적인 것의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어 날뛰며 그러는 사이 반쯤 미친 거 같은 눅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연민이었고 영화를 보는 내 시선의 축이었다. 사람들과의 따뜻한 소통 속에 비로소 인간다운 관계를 맛보던 눅스는 마침내 자기의 길을 택해 떠나며 온 생을 한 초점에 담아 부탁을 한다, 나를 기억해줘.
폭풍 같은 모래바람이 휩쓰는 전쟁터에서 어린 청년이 택한 소원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억되고 싶다는 것, 그것도, 나를 좋아해준 너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것, 그니까, 내가 좋아한 네가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에 따라서는, 헨처드와 눅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목숨 연명을 뛰어넘고 새로운 세계 건설이라는 도전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실은 신성보다 더 무거운 가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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