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외로운 다리를 건너는 법

음정·박자 모눈종이에 없는 해상도 지닌 <케이팝스타 4> 케이티 김…
복받치는 이민자의 슬픔으로 무너진 <양화대교>가 최고였던 이유
등록 2015-03-18 17:34 수정 2020-05-03 04:27

SBS 오디션 프로그램 에 출연 중인 ‘케이티 김’이라는 참가자가 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버클리음대 재학생답게 첫 무대에서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재즈적 감성으로 잘 소화해냈고 전반적으로 고르게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스물두 살의 앳된 여성 보컬리스트다. 그녀가 리듬앤드블루스(R&B)로 편곡해 부른 은 심사위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방송 다시보기 영상 최단시간 300만 건을 기록하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녀가 들려준 최고의 음악은 톱10 문턱에서 그녀를 탈락 위기까지 몰고 갔던 였다고 생각한다. 이민 직후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자이언티의 가사를 직접 고쳐 썼는데, 그래서인지 ‘아빠’ ‘엄마’ ‘아프지 말고’ 등의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울컥하는 바람에 모든 게 망가져버린 무대였다. 케이티 김은 심사위원 양현석의 선택으로 겨우 다음주에 을 부를 기회를 얻었다.

엄청나게 틀려도 듣기에 좋았던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부분에서 케이티 김의 능력이 돋보였다. 음정과 박자가 무너졌는데 그것마저도 음악적으로 좋게 들렸기 때문이다. 왜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그녀의 음정과 박자 감각이 일반적인 대중음악 보컬리스트들보다 훨씬 세밀한 해상도를 갖고 있고, 기준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점은 한국 보컬리스트들에게서 찾기 힘든 좋은 능력과 태도다.

이민자 는 왜 노래를 잘하는 걸까? 톱8 중 4명이 이민자 자녀인 〈케이팝스타 4〉는 음악이 외로운 이들의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 에스더 김, 그레이스 신, 케이티 김(왼쪽부터).  SBS 제공

이민자 는 왜 노래를 잘하는 걸까? 톱8 중 4명이 이민자 자녀인 〈케이팝스타 4〉는 음악이 외로운 이들의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 에스더 김, 그레이스 신, 케이티 김(왼쪽부터). SBS 제공

음악에는 물리학적으로 엄격하게 정의되는 ‘길’이 있다. 음정은 소리의 주파수로 표현 가능하고, 박자는 모눈종이처럼 나눠진 반복적 시간의 간격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잘 훈련된 뮤지션이라면 반음의 10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음정 차이도 알아차릴 수 있고, 리듬의 경우 100분의 1초보다 훨씬 세밀하게 맞출 수 있다. 일반인들로서는 초인처럼 느껴질 만한 능력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음악적으로 좋은 연주의 비결은 그 정해진 길로부터 얼마나 ‘잘 벗어나는가’에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제 컴퓨터처럼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구사하는 가수나 연주자들은 쉽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물론 ‘못 맞추는’ 아마추어보다는 낫겠지만 말이다.

케이티 김이 울음 반 노래 반으로 를 불렀을 때, 그래서 거의 반음 가깝게 음정이 엇나가고 반주자가 당황할 만큼 박자를 놓치곤 했을 때, 나는 마치 술 취한 원로 예술가가 삐뚤빼뚤 붓질을 하거나 비틀거리면서 춤을 추는데도 예술이 되고 마는 상황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 엄청나게 ‘틀리고’ 있는데도 듣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진짜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길을 벗어나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그만의 길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랄까.

톱8 중 4명이 이민자 자녀

한국에서는 아직도 남이 닦아놓은 길을 잘 걷기만 해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반면 익숙하고 안정적인 땅 위의 길이 아닌, 물 위의 ‘다리’를 건너는 일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된다. 산업·교육 등 다른 영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대중음악도 오랫동안 ‘서구의 근대가 이뤄놓은 결과물을 빠르게 도입해서 얼마나 근사하게 모방하는지’가 지상 과제였다. 그러다보니 현지에서 다년간 서구적인 정서와 기술을 습득한 이민자 1~2세대들은 항상 경연에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빠다기 가득한’ 이민자 참가자들은 늘 안정권에 들다가 막판에 어딘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더라도 한국 대중이 지닌 정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하면 보컬리스트로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의 톱8 중 무려 4명이 이민자 자녀들이다. 그리고 모두들 처음부터 기술적으로 두각을 보이다가 심사위원들의 “너의 속이 안 보인다”는 깊은 ‘갈굼’(!) 직후에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박진영의 어이없는 선곡으로 역시 탈락 위기에 놓였던 릴리 M은, 전혀 준비하지 못했던 조별 2위 재대결에서 케이티 페리의 (Roar)를 불러 본인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그레이스 신과 에스더 김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음악은 다른 어떤 대중예술보다 ‘슬픔’과 ‘위로’에 가까이 닿아 있는 장르다. 그래서 뮤지션이 꼭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슬픔과 불안을 아는 뮤지션이 대중에게 더 다가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다소 의외였던 것은 ‘연기 잘하는 아이돌’처럼 보였던 릴리 M이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친구와 선생님들을 잃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대목에서, 이 어린아이가 그렇게 깊은 감성을 갖게 된 것이 단순히 재능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평균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사회에서 자라났다는 이유로, 서구 음악에 종속된 한국 음악 신(scene)의 특성 때문에, 그동안 나는 이민자 자녀들이 쉽게 음악적 기술을 쌓았고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인간 감정의 중요한 부분인 슬픔을 모른 채 좋은 뮤지션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뮤지션에게 상처는 때로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꼭 뮤지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위험과 우울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름의 쓸모를 지닌다. 다리 위의 삶이란 너무도 불안해 보이지만 거친 강물 너머로 나의 길을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말이다.

저마다의 양화대교에서 통곡해야

가사 속에서 케이티 김은 ‘양화대교’에 서 있다. 10여 년 전, 아버지는 익숙지 않은 사회에서 익숙지 않은 작업을 하기 위해 조지워싱턴 다리를 건넜고, 지금 그녀는 한국 땅으로 돌아와 자신에 대한 가족의 익숙지 않은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양화대교를 건넌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양화대교는 20년 전 학교 후배가 자살을 택한 다리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아이도 마지막 그 순간에 비틀거리며, 울먹이며 다리를 건너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순간에, 그 다리를 건너게 되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는 케이티 김처럼, 삶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감정을 터뜨려버려야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음정과 박자의 모눈종이를 무시하고,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다리를 건넜을 때, 나의 고유한 소리, 나만의 길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리라는 것은 길과 길을 잇는 또 하나의 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충한 작곡가·유자살롱 공동대표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