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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영재에게 허락된 평화는 어디에

몸은 아이지만 마음만 커버린 ‘거인’, 그룹홈 생활하는 청소년 그린 김태용 감독의 <거인>
등록 2014-11-22 15:46 수정 2020-05-03 04:27

절박한 사람은 진심을 챙길 여력이 없다. 영화 의 영재(최우식)는 가톨릭 그룹홈 ‘이삭의 집’을 제 발로 찾아갔다. 아무도 그에게 집에서 “나가라” 하지 않았지만, 영재는 떠밀려 떠났다. 무책임한 아버지, 무능력한 어머니, 여린 동생이 있는 집은 거들떠보기도 싫은 곳이다. 그룹홈 원장 부부를 “아빠, 엄마”라 부르는 세례명 ‘요한’으로 살아가는 영재는 17살이 되자 그룹홈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된다. 돌아갈 곳은 없는데 나가야 하는 영재는 절박한 생존투쟁을 벌인다. 영재는 쫓겨날 위기를 넘기고, 살아갈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 신부가 되겠다고 한다. 살기 위해 영재는 원장 부부의 환심을 사야 하고, 성당 신부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 영재는 환난의 가운데 있다. 열일곱 영재에게 허락된 평화는 없다. 그의 눈빛에 진심이 깃들 리가 없다.

이토록 냉담한 성장영화

〈거인〉은 사춘기 홍역이 없는 성장영화다. “더 이상 들 철도 없는” 영재(최우식)는 오직 생존을 위해 표정을 꾸민다. 이보다 더 지독한 진심은 없다.  CJ ENM 제공

〈거인〉은 사춘기 홍역이 없는 성장영화다. “더 이상 들 철도 없는” 영재(최우식)는 오직 생존을 위해 표정을 꾸민다. 이보다 더 지독한 진심은 없다. CJ ENM 제공

도처에 어른은 갑(甲)이다. 무책임한 아버지는 동생마저 영재가 사는 그룹홈으로 보내려 하고, 무정한 “원장 아빠”는 끝없이 영재에게 나가라고 눈치를 주고, 엄마마저 끝내는 영재의 고통을 몰라준다. 신부, 담임 등으로 불리는 세상의 어른들 누구도 영재를 돌보지 않는다. 영재는 착한 아이가 아니다. 원장 부부의 신뢰를 이용해 물건을 훔쳐 팔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같은 처지의 그룹홈 친구 범태(신재하)를 고발한다. 신앙심 따위도 없다. 신학교를 가면 생계가 해결되니까 신부가 되려고 한다. 진퇴양난에 고립무원, 영재는 영화 의 엄마를 닮았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진실에 눈감는 엄마처럼, 자신이 살기 위해서 영재는 진심에 눈감아버린다. 그래야 사니까. 영재의 간절한 말들은 때로 은근한 협박이 돼서 어른들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영악한 생존투쟁을 벌이며 영재는 ‘거인’이 된다. 몸은 아이지만, 마음만 커버린 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비극은 아니다. 오히려 영재는 어떤 기성의 것에도 기대지 않는 존재가 된다. 어른, 종교, 심지어 선의까지 기성의 것에 대한 영재의 시선은 냉담하다. 그가 아버지를 증오하고, 종교를 불신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런 영재를 좇아가는 은 철저히 10대의 시선에서 본 성장영화가 된다. 부모와 종교에 이토록 냉담한 성장영화는 드물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영재를 보면서, 오늘의 우리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세상, 영재는 살기 위해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다. 원장 부부와 성당 신부처럼 자신을 지켜줄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감정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영재, 자신과 가장 비슷한 처지의 친구마저 외면하고 제거하는 영재를 보면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떠올리게 된다. 영재의 절박한 처지는, 한 발만 헛디디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처지에 처하는 사회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이렇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는 순간의 에 있다.

기성의 형식을 벗어난 구원

은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 바탕한 영화다. 올해 29살인 그는 “20대가 끝나기 전에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30대가 되기 전에 만든 이유가 또 있다. “내가 영재를 어른의 시선으로 보기 전에”라고 그는 말했다. 2천만원의 제작비로 시작한 영화는 용하게 커서 개봉에 이르렀다. 영재를 연기한 최우식은 첫 주연작으로 부산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김 감독은 단편영화에서 그의 “비릿한 눈빛”을 보고 캐스팅했다. 그를 포함해 배우들의 연기를 이끌어내는 감독의 내공이 신인답지 않다.

새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것처럼, 저마다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다. 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인 그룹홈 원장은 영재에게 “니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만 버리면 돼”라고 말한다. 실제 김 감독이 그룹홈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라고 한다. 잘 보이려 애쓰는 영재를 끝까지 의심하는 인물인 그의 말이 품은 독한 진실이 있다. 자신을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연민만 넘치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영재의 사연은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영화의 후반부 15분은 처절하다. 사람이 죽거나 하는 파국이 없지만, 긴장감으로 숨막힌다. 은 끝끝내 영재가 참회할 대상은 부모나 종교와 같은 기성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배신한 비슷한 처지의 친구 범태뿐이라고 말한다. 결국은 영화가 영재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은 기성의 형식에서 벗어난 구원에 이른다. 김 감독은 “아이들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재의 마지막 대사, “출발해요”. 영재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지만, 영재의 삶이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은 지난 11월13일 개봉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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