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바이어를 만나러 가는 길이 꽉 막혔다. 오 과장이 탄 차는 30분 동안 500m를 전진하는 중이다. 불안불안한데 전화로는 부장의 ‘해고예고수당’ 받고 싶냐는 협박이 들어온다. 당장 잘릴 수 있다는 위협이다. 약속 시간은 30분 ‘오버’될 것 같다. 부장은 바이어를 잡고 있으려고 인턴을 보낸다. 부랴부랴 미팅 자리에 도착하니 바이어와 인턴은 조용히 퀴즈 문제를 풀고 있다. 미팅을 끝내고 헤어질 때 바이어는 “그게 무슨 퀴즈냐”고 묻고 “(영어로) ‘GO’라고 하던가”라고 부장이 말하면 신입은 “아니요, BADUK”이라고 답한다.
직장인의 수많은 공감을 자아낸 웅얼거림
오 과장과 장그래의 첫 만남이다. 이상한 거 하나 물어보자. 바둑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흑과 백이 섞인 무늬나 그런 얼룩덜룩한 개를 일컫는 말이 이 게임보다 먼저일까 뒤일까. 그런 무늬를 닮았기에 게임 이름을 바둑이라고 한 것일까. 어원을 살펴보면 바둑은 ‘밭과 독(돌)’의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게 먼저일지는 오리무중이다. 어쨌든 고유의 한국말이 있는 바둑은 조선 땅을 기원으로 한다는 설이 세다.
윤태호 만화가의 이 드라마화되었다. 2012년 1월20일부터 2013년 7월19일까지 1년7개월간 미디어다음의 ‘만화 속 세상’에 연재되었다. 윤태호 만화가는 단행본 9권 마지막의 후기에서 미생에 매달린 시간(첫 계약부터)을 4년7개월이라고 했다. 드라마화 제안은 아주 많았는데 윤태호 작가는 결국 tvN을 낙점했다. KBS , tvN 를 만든 김원석 PD가 연출을 맡고 에서 무시무시한 내공을 보여준 정윤정 작가가 대본을 썼다. tvN은 제작발표회장에서 드라마 의 준비 기간을 2년이라고 했다. 드라마 은 10월17일 금요일 90분짜리로 포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만화를 ‘직장인 만화의 바이블’이라 했는데, 드라마는 ‘미답의 직장인 드라마의 탄생’으로 한 획을 그을 듯하다.
제일 앞에 인용한 에피소드는 만화와 드라마에서 조금씩 다르다. 만화에서는 부장이 전화를 걸고 드라마에서는 김 대리가 전화를 건다. 바이어의 이름은 드라마에서는 헨리로 나오고 오 과장은 출장에서 돌아왔지만 만화에서는 항의 차원에서 산에 올랐다. 만화에서 장그래는 지각을 했지만 드라마에서는 제일 먼저 출근했다.
만화에서는 오 과장의 상황을 묘사하는 윤태호식 설명법이 나온다. 직장인의 수많은 공감을 자아낸 웅얼거림이다. “내 입을 틀어막으며 땅끝 무저갱으로 이끄는 삶의 짐. 턱걸이를 만만히 보고 매달려보면 알게 돼. 내 몸이 얼마나 무거운지. 현실에 던져져보면 알게 돼. 내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전 국민의 만화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옥상의 장그래 때문에 눈물을 쏟았다. 영업3팀의 성가에 퇴근 뒤에 술도 펐다. 오 과장은 만화에서 말한다. “야구는 타자보다 투수가 유리하다더군. 그 투수가 언제나, 항상 최선의 투구를 할 수 있다면 그 공을 칠 수 있는 타자는 없을 거야.”(95수) 드라마는 공을 쳐낼 뿐이었을까.
공을 쳐내야 하는 타자 혹은 넉 점 바둑사실 후발주자 드라마의 이점이 있다. 넉 점을 깔고 바둑을 두는 것 비슷하다. “판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다 알아요.”(8수) 윤태호는 만화 후기에서 자신의 그림체가 바뀐 것을 아쉬움으로 꼽는다. 연재 기간 1년7개월, 만화가 초읽기에 쫓긴 고수의 묘안이라면 드라마에는 휴식을 충분히 취한 고수의 여유로운 포석이 있다. 얽힌 난마를 착수점부터 내다본 것이랄까. tvN의 여유로운 작업 스케줄도 드라마를 돋보이게 한 배경일 듯하다. 와 마찬가지로 공중파에서는 시도하지 않는 금·토 드라마다. 공중파 드라마와 달리 타깃을 분명히 한 ‘응사’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근차근 미리 정한 결말(누가 다정의 남편이 될 것인가)을 향해 달려갔듯이( 4월24일치) 또한 다 아는 이야기를 달리되 풍경을 바꿔놓았다.
가끔은 바둑과 바둑 무늬의 오리지널 싸움이다. 드라마에서 ‘여유롭게’ 추가한 장면은 바둑 무늬로 드라마에 얽혀든다. “긴장하셨나봐요, 양복 윗옷은 벗으셔도 되는데…” 같은 대사나, 장그래가 일찍 출근해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어머니가 밤새 눈이 뻘겋게 되도록 고민하며 ‘새빠치’ 양복을 사거나, 꼴뚜기가 섞인 오징어젓 적발 현장으로 출동하거나 하는 에피소드 등이 발군이다. 성격을 드러내고 직업의 일을 이해하고 인턴 사이에서 장그래의 위치를 보여주기 위해 적절하게 포진했다. 독자에서 시청자가 된 이들을 어떻게 두근거리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의 결과다. 만화는 인간 풍경의 만화경이었다면 드라마는 감정을 고조시키며 드라마틱하다.
윤태호 작가가 연애 이야기를 못하는 것은 유명하다(아내밖에 몰라서라고 하더라). 그리고 못된 사람도 못 그린다. 드라마에서는 이 두 가지 ‘결점’(?)이 깨져간다. 정말 못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냥 미운 게 아니라 징글징글하게 미운. 그러니 드라마에서 기대할 수도 있겠다. 우리 그래, 드라마에서는 연애 한번 하려나.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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