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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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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픈 역사 속으로, 드루와~

63년 이어온 아시안게임의 짜릿·애잔·황당한 순간들…

강세 종목 메달 수 늘리고, 시상대 선 남북 선수는 엉덩이 싸움을
등록 2014-09-24 17:12 수정 2020-05-03 04:27

마침내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성화가 타올랐다. 아시안게임은 1951년 시작돼 63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긴 역사만큼이나 짜릿한 승부와 웃지 못할 뒷얘기,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단식 결승은 가장 극적인 승부로 꼽힌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 수에서 11-12로 타이에 1개 뒤져 일본, 타이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었다. 한국은 은메달 수(18-14)에서 타이에 4개 앞서 있었기 때문에 금메달 1개만 추가하면 종합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대회 폐막 전날 타이는 모든 경기를 끝냈고, 한국은 유일하게 탁구 남자단식 결승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김충용과 맞선 일본의 하세가와 노부히코는 세계랭킹 1위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김충용이 하세가와를 세트스코어 3-2로 이기고 믿기지 않는 금메달을 따냈고, 한국은 극적으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을 금메달 수에서 63-59로 제치고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대회가 끝난 뒤 두 달여가 지나서야 중국 수영선수 11명의 금지약물 복용이 드러나 이들의 메달이 박탈됐다. 이에 따라 일본은 금메달 5개를 승계하며 금메달 수가 63-64로 역전됐다.

북한 이기려 경기복 입은 국회의원

아시안게임은 개최국 텃세가 심하다. 그래서 황당한 일도 많았다. 1974년 테헤란 대회 때 개최국 이란은 전통적으로 강한 역도 종목에 인상, 용상, 합계까지 체급별로 금메달을 3개씩 배정했다. 아시안게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이란은 종합 2위로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테헤란 대회는 또 마라톤을 치르지 않은 유일한 아시안게임이었다. 마라톤의 기원이 된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패전국이 바로 이란이었기 때문이다.

개최국 텃세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6년 서울 대회에서 ‘메달밭’ 양궁의 금메달 수를 4개에서 12개로 늘렸다. 거리별로 30, 50, 70, 90m를 만들고 개인종합과 단체전까지 배정했다. 덕분에 한국은 금메달 9개를 휩쓸었다. 복싱에서도 마지막 날 일제히 펼쳐진 체급별 결승에서 12개 전 체급을 싹쓸이했다. 그래도 한국은 중국에 금메달 수에서 94-93, 1개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냉전시대 남북 대결에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많았다. 북한이 아시안게임에 처음 출전한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선 북한을 이기기 위해 현직 국회의원이 출전한 일도 있었다. 주인공은 역도선수 출신의 신민당 황호동 의원. 은퇴한 지 6년이 지난 그는 메달 하나라도 더 보태려고 대회 도중에 양복 대신 경기복으로 갈아입고 급파돼 은메달을 따냈다.

이 대회에서 남한은 북한을 금메달 1개 차이(16-15)로 제치고 4위를 차지했다. 애초엔 북한이 금메달 수에서 18-16으로 앞섰지만 역도에서 3관왕을 차지한 북한의 김중일이 금지약물 복용으로 금메달 3개를 모두 박탈당하는 바람에 순위가 뒤바뀌었다. 김중일의 금메달은 세 종목 모두 은메달리스트였던 이란의 하우상 카르간네자드가 고스란히 승계받으며 이란이 중국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억울하다고 펄쩍 뛰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북 대결이 펼쳐진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어느 쪽이든 지면 국민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수비를 두껍게 쌓았고, 연장까지 120분간 하품 나오는 경기를 펼쳤다. 결국 0-0 무승부. 당시엔 비기면 공동 금메달을 줬다. 시상대에 선 남한 주장 김호곤과 북한 주장 김종민은 억지 춘향 격으로 손을 잡았고, 비좁은 시상대에서는 서로 엉덩이를 밀치며 자리 싸움을 했다.

“금메달을 바친다” 말 남기고 먼저 떠나

1990년 베이징 대회 여자양궁 개인전은 북한이 가져갈 뻔한 금메달을 한국 사진기자들의 ‘소음’으로 뺏다시피 했다. 북한의 김정화가 세 발 남길 때까지 남한의 이장미에게 3점 앞서 금메달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남한 사진기자들이 김정화의 8번 사대로 우르르 몰려갔다. 무명인데다 소음 훈련이 안 된 김정화는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당황했고, 8번째 화살을 6점에 쏘고 말았다. 결국 선두를 달리던 그는 합계 335점으로 5위로 떨어졌다. 반면 남한의 이장미(339점)·이은경(338점)·김수녕(337점)은 나란히 금·은·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레슬링 그레코로만 100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송성일(당시 25살)의 별명은 ‘갤포스’였다.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때 위장약을 입에 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금메달을 딴 뒤 당시 위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에게 금메달을 바친다”고 했다. 정작 자신이 위암 4기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석 달 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송성일은 말기암으로 종합스포츠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유일한 선수로 기록됐다.

김동훈 온라인뉴스팀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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