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인 저의 경우 그런 불필요한 친목과 음주와 아부로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와 같은 회식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며 참석을 강요하는 팀장 장규직(오지호)에게 3개월 단기계약직 사원 미스김(김혜수)이 쏘아붙였다. TV 앞에 앉은 시청자 여럿은 대리만족을 느꼈을 테다. 하지만 우리는 금세 깨닫는다. 현실의 위태로운 계약직들이 미스김의 직설을 따라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와이장그룹의 계약직 사원 정주리(정유미)는 매회 자신의 처지를 깨달으며 이런 내레이션을 거듭한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그런 우울의 시간이 있었다. 20대의 한때 나는 수명이 다할 듯 말 듯 아련한 빛을 내는 ‘급 낮은 전구’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2008년,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기 전 모 금융기관의 사보를 만들었다. 파견직 사원으로. KBS 월·화 드라마 에서 정주리를 와이장에 파견하며 정주리의 ‘브로커’ 역할을 한 용역업체 ‘파견의 품격’과 비슷한 회사를 통해 그곳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출근 첫날 나의 호칭은 ‘작가’로 정해졌다. 월간으로 발행되는 사보에 들어가는 모든 기사를 쓰고 편집하는 업무이긴 했지만 이런 황송한 호칭이라니. 하지만 호칭이란 부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법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작가란 무엇이든 쓸 수 있고, 지어낼 수 있는 사람을 요약하는 말이었다. 참석하지 않은 회사의 행사에 대해 행사 시나리오만 보고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써달라고 했다. 고쳐 써달라는 엉망진창 방송 대본은 새로 쓰는 편이 나았다. 계약 당시에는 업무에 따라 자유롭게 출퇴근하기로 했는데, 어느덧 그 회사 직원들과 같이 아침 8시30분까지 출근하라는 요구도 받았다. 필요할 때만 한솥밥 식구처럼 대하는 차별의 시간 속에서 내가 했던 유일한 반항은 부장이 제안하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미스김처럼 통쾌하게 상사에게 내지르진 못했지만.
그곳을 떠나오고 5년이 지났지만 한국 직장에서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별은 더 치졸하고 깊숙하게 일상화한 듯하다. 에서 장규직은 일상적 차별과 해고는 산업의 고도화가 만들어낸 불가항력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규직은 한솥밥 먹는 정규직 식구들을 ‘브레인’ 같은 소프트웨어, 이름 부르기조차 아까워 ‘언니’로 통칭하는 계약직 사원들을 언제든 바꿔 끼울 수 있는 하드웨어라고 비유한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사이의 장벽은 수치로 세워진다. 공채 신입사원 금빛나(전혜빈)의 연봉은 3천만원이다. 비슷한 기간 계약직으로 입사한 정주리의 연봉은 1200만원에 불과하다. 금빛나의 정년은 30년이고, 정주리의 계약 기간은 3개월이다. 금빛나는 실적과 연차에 따라 연봉이 오르겠지만, 정주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1년에 100만원 오르는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다음해에 계약 연장을 성사시켰을 때의 얘기다.
TV평론가 김선영씨는 에 대해 “과거 드라마에서 때때로 직장 내 차별이 그려지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불합리한 고용 문제를 다룬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드라마는 캐릭터들의 과장된 행동,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미스김의 행보 등 만화 같은 설정을 하고 있지만 웃음 안에 현실의 무거운 이야기들을 담아낼 참이다.
찍어 먹어보기 전에 아는 ‘똥’
극에서 이 시대 비정규직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인물은 정주리다. 정주리는 출입증 대신 사원증을 목에 건 정규직이 되기 위해 늦은 밤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남에게 빼앗길 기획안을 밤새워 쓴다. 2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모두가 허황된 것이라 치부해버린 꿈을 꾼다. 업무 중 실수를 하면 자리를 박탈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공을 세우면 고스란히 다른 정규직 사원에게 돌려야 한다. 정주리는 입사 면접에서 자신을 아직 숙성하지 않은 메주로 소개하고 “똥인지 된장인지는 찍어 먹어봐야 안다”고 당돌하게 말했지만 입사 이후 내내 ‘똥’ 취급만 당한다.
그러므로 정주리의 반대편에 서서 직장 생활의 불합리와 몰상식에 대응하는 미스김의 행보는 통쾌하다.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의 삶을 택한 미스김은 수당 없이 시간 외 업무를 하지 않고, 출퇴근과 점심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미스김 사용 설명서’에 없는 업무는 누가 시키더라도 하지 않는다. 종종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며 들라크루아의 을 형상화하는 미스김의 모습은 때때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미스김이 펼쳐내는 만화 같은 이야기가 사실은 차별이 일상화된 시대를 향해 던지는 역설 아닐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