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앞에 엎드린 작은 상가들, 그중에서도 손바닥만 한 학교 ‘성프란시스대학’이 8년째를 맞았다. 올해도 의수족 가게 2층 100㎡ 남짓한 강의실에서 33살부터 62살까지 노숙인 27명이 모여 인문학 과정을 밟는 중이다. 얼마 전 해마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1년짜리 인문학 강좌를 열어온 성프란시스대학 이야기를 담은 책 이 나왔다. 11월13일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열린 2012 제12회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된 독립영화 (남경순 감독)에도 이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여러 해 전 대학 울타리를 벗어났던 인문학은 지금 작은 공동체에서 터 잡는 참이다. 지난 8월에는 서울 서교동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대안 대학원 과정을 열었다. 2년 과정의 ‘전문 저술’과 3년 과정의 ‘파이데이아 철학대학원’이다. 둘 다 실력 있는 재야 학자를 목표로 한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N도 3월부터 ‘인문사회과학 연구원’ 모집에 나섰다. 강도 높은 연구와 글쓰기 훈련을 벼른다.
가르치는 교수님, 배우는 선생님 “언제나 한 글자”
성프란시스대학에서 배우는 사람은 선생님, 가르치는 사람은 교수님이라 불린다. 배우는 ‘선생님’들은 철학·역사·문학·예술사를 한 학기에 두 과목씩 나누어 배우고 글쓰기는 1년 내내 계속한다. 박남희(철학아카데미·철학사), 김동훈(예술사·덕성대), 박경장(글쓰기·명지대), 박한용(한국사·민족문제연구소), 안성찬(문학사·서울대) 등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가장 먼저 부닥친 질문은 인문학이 머물 곳도 없는 이들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7년째 예술사를 가르쳐온 김동훈 교수는 대체로 매 학기 수업 첫 시간은 “어느 술에 취한 노숙인의 ‘가난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대체 예술은 왜 가르치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기말이 되면 많은 ‘선생님’들이 자존감을 찾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프란시스대학의 강의실 벽에는 어느 졸업생이 남긴 “오늘도 한 글자, 내일도 한 글자, 언제나 한 글자”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궁극의 가난함’에 처해 누구나 한 번씩은 자살을 기도해봤다는 그들이 이곳에서 얻은 한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은 미국 빈곤계층을 위한 인문학 과정 ‘클레멘트 코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에서는 의사·박사가 나오지만 우리 사회에선 한번 가정을 잃고 일상적인 경제체제에서 도태됐던 사람들이 주류 사회에 진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대학에서 얻는 근본적인 보람은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사람들이 인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태도를 바꾸는 과정에 있다. 이곳은 대학이면서도 인간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여기서 후퇴한다면 내 인생도 실패한다는 생각으로 가르치게 된다.” 김동훈 교수의 말이다. 쪽방촌에서, 임대주택에서, 노숙인 쉼터에서 와서 인문학을 배웠던 졸업생들은 다시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거나 사회복지 수혜자에서 벗어나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한다. 한 노숙인은 죽기 전에 수업에서 배웠던 미술사 책을 다시 들여다봤다고 한다. 아마 그림을 바라보며 자신의 눈빛도 들여다보고 삶도 들여다보았던 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이리라고 추측한다.
박경장 교수는 책에서 “노숙인과 인문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며 “노숙인과 인문학은 전방위적 자본주의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했다. 박한용 교수는 “노숙인들은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고, 인문학은 이들을 통해 문제의식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노숙인과 인문학의 만남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상호 소통의 과정”이라고 했다.
죽기 전 미술사 책을 들여다본 노숙인
대안연구공동체에서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여러 종류의 인문학을 배운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교양 강좌를 꿈꾸는 이곳에선 라틴어부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터키어 등 다양한 언어권의 사상·문화 강좌를 연다. 대안연구공동체 대표를 맡은 김종락 전 문화부장은 “지난해 60여 개 강좌로 시작해 현실적으로 줄이고 또 줄인 것이 이 정도”라며 “주부·대학생·변호사·의사·기자 등 직업도 다양한 수강생 250명이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해 자기 삶의 인문학적 바탕을 얻으려고 배움과 글쓰기 강도를 높이고 있다”고 했다.
태생부터 제도 밖인 이들 거리의 대학은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팔을 벌린다. 김 대표는 “처음에는 학자의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강단에 대한 꿈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푸른역사아카데미, 문지문화원 등 시민들의 배움터와 선한 연대를 꿈꾼다. 언젠가는 이들과 함께 인문대학원을 열어 우리 사회 담론 생산의 중요한 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몇 해 전 수유너머·인권연대 등과 성매매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현장인문학 심포지엄’을 열었던 성프란시스대학은 12월5일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거리의 인문학을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북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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