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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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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사회’가 낳은 복고 게임

등록 2012-09-05 17:43 수정 2020-05-03 04:26
<스트리트파이터4볼트>

<스트리트파이터4볼트>

<킹오브파이터즈>

<킹오브파이터즈>

1990년대 중·고등학생이었던 이들은 역사상 가장 왕성하게 문화를 소비했던 계층 중 하나다. 풍족하지 않은 용돈에도 1만원이 넘는 CD를 사모았고, 슈퍼패미콤의 킬러 소프트였던 같은 게임들은 10만원이 넘는 고가에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그 아이들이 20여 년이 지나 성인이 되자 가장 강력한 소비 계층이 됐다. 소비의 힘 덕분에 90년대 열풍은 단순한 추억 곱씹기를 넘어 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음악에 서태지, 게임은 ‘스파’

음악에 서태지가 있었다면, 게임에는 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발매보다 1년 이른 1991년, 처음 한국에 소개됐던 이 게임의 인기는 말 그대로 전무후무했다. 아이들은 게임기 위에 동전을 쌓아놓고 하염없이 스위치를 두드렸다. 당시 꽤 큰 규모였던 시내의 한 오락실은 모든 게임기를 오직 로만 채워넣기도 했다. 이후의 게임 시장은 모두 의 자장 안에서 움직였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류작이 나왔지만, 누구도 원작의 아성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독재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게임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게임이 지난 연말 한국 앱스토어에 등장했다. 아쉽게도 는 아니고, 라는 이름으로(해외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일찍 발매됐다). 조이스틱을 바쁘게 움직이는 대신 ‘비주얼패드’라는 이름으로 화면을 터치해서 조작하는 형태였다. 게임의 완성도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10~20대는 물론 30대에게도 이례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최근 앱스토어의 상위권에는 역시 추억의 대전 액션 게임인 가 위치해 있다. 그 아래로 정통 액션 게임인 ,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인 , 전설적인 롤플레잉 게임인 같은 이름도 보인다. 모두 90년대를 강타했던 기념비적인 게임들이다. 나 같은 클래식 게임은 물론 부르마블이나 낱말 맞추기 같은 보드게임도 순위의 군데군데에 포진해 있다. 이뿐인가. PC용 게임인 넥슨의 는 최근 갑자기 이용자가 급증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런데, 이것도 단순히 복고 열풍의 일부일 뿐일까.

과거에는 게임의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설명서가 사실상 필요 없었다. 직접 컨트롤러를 몇 번 움직이다 보면 직관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발매되는 게임의 대다수는 난이도가 상당하다. 능숙하게 조작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수많은 기능키와 조작법을 숙지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게임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진입장벽이 높은 셈이다. 가뜩이나 치열한 생활에 지친 30대가 굳이 게임까지 배워가며 할 엄두가 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 복고 게임들이 다시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90년대에 대한 향수도 분명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이 피로 사회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게임을 하면서까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에게는 게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익혀야 하는 수없이 많은 매뉴얼이 있다. ‘멀티’라는 이름의 기기들은 복잡한 사용법을 요구하곤 한다. 현실도 피곤해 죽겠는데, 게임까지 공부하듯 해야 하다니. 그건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얼마 전 발매된 의 엄청난 인기에는 ‘의 리메이크’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비슷한 조작법과 시스템도 한몫했다. 그건 올드 게이머들을 다시 모니터 앞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훌륭한 장치였다).

조금 슬픈 스마트 시대의 게임 즐기기

나도 지금까지 많은 게임을 즐겼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게임을 접하는 게 힘들다. 게임의 시스템에 적응하려고 애써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피로하게 느껴져서다. 그러다 보니 복잡해 보이는 게임은 우선 앱스토어의 구매 리스트에서 제외된다. 대신 쉽고, 편하게, 잠깐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정도의 게임 위주로 고르게 된다. 지금 내 스마트폰 안에 있는 게임은 복싱이나 레이싱 같은 스포츠, 혹은 목적 없이 무작정 달리며 장애물을 피하면 되는 러닝 게임, 대전 액션 게임 정도가 전부다.

어젯밤에도 스마트폰으로 를 플레이했다. 게임은 편하고 즐겁다. 막고, 차고, 던지면 된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는 마음처럼 잘 안 나오던 필살기가, 스마트폰 안에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쉽게 발동된다. 하지만 돌아온 복고풍 게임에는 예전처럼 마음 졸이던 감동은 없다. 특별한 기쁨도 긴장도 없이 몇 게임을 숙제하듯 치른 뒤 내일을 준비하며 잠을 청했다. 갑자기 이게 스마트 시대에 게임을 즐기는 방법인가, 조금 슬펐다.

이기원 디지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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