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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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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시는 한국의 좀비다

청소년 뜨거운 호응 속에 450만명 관객 모은 영화 <연가시>의 흥행 분석

세계 최고 자살률 한국 청소년, 좀비의 한국적 변형인 집단 자살에 공명해
등록 2012-08-14 19:13 수정 2020-05-03 04:26
<연가시>가 그리는 재난 이후의 세계는 한교라는 수용소에 갇힌 청소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상투적 가족신파도 10대의 눈높이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연가시>가 그리는 재난 이후의 세계는 한교라는 수용소에 갇힌 청소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이 영화의 상투적 가족신파도 10대의 눈높이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가 45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나 에 크게 밀릴 거란 예상을 깬 흥행이다. 뜻밖의 흥행에 추측이 분분하다. 3~4년 전부터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한 ‘곱등이·연가시’ 괴담이 주효했고, 개봉에 앞서 웹툰이 공개된 것이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전 연령대를 포괄하는 관객 중 청소년 관객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은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의 흥행에는 그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영화가 말하는 공포의 핵심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 관객의 심리상태와 공명했다는 사실이다.

에 대한 오해?

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이 영화가 재난영화와 가족신파가 뒤섞인 상투적 구성을 갖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에서도 그랬듯, 중년 관객을 모으는 요소로 작용했다. 수작으로 꼽히는 역시 가족신파의 요소가 강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한국 블록버스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공포물로서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지적을 세분하면, 연가시의 징그러운 모습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거나, 사람에서 사람으로 직접 전파가 없어 감염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는 지점에서 공포가 반감된다거나, 특효약을 찾은 이후에는 액션으로 장르가 바뀐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의 장르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말들이다. 가 징그러운 기생충이 신체를 파고드는 장면 등을 넣지 않은 이유는 등급을 고려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괴수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서 진짜 공포를 일으키는 요소는 징그러운 기생충이 아니라 감염자들의 광기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 감염자들이 집단 자살로 내달리는 광경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포의 핵심이다. 확산되는 것은 기생충이 아니라 자살 충동으로 들끓는 전 사회적 공황상태다. 특효약이 발견된 이후의 장르는 액션이 아니라 사회극으로 봐야 한다. 요컨대 의 장르는 집단 자살의 공포를 그린 사회극이다.

가 그리는 사회상은?

박사이지만 주식으로 재산을 날리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주인공(김명민)에게 가족은 먹여살려야 할 입이다. 영화의 첫 장면, 주인공은 놀이공원에서 머슴처럼 착취당한다. 병원 원장의 가족에게 감정노동을 하다가 집에 가니, 진짜 가족이 놀이공원에 가자고 한다. 짜증을 내고 돌아서니, 가족은 아귀처럼 먹어댄다. 그가 짜증 내는 이유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금융자본에 저당 잡히고 소외된 노동으로 감정 착취를 당한 그에게 가족과 친밀감을 나눌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 먹어대는 것은 감염 때문이다. 감염자는 엄청난 식탐에 시달리다가 연가시가 몸 밖으로 나올 때쯤 극심한 갈증을 느끼다 물로 뛰어든다. 이때 연가시가 빠져나오면 감염자는 완전히 고갈된 상태로 죽는다. 기갈(飢渴)은 해소되지 못한 욕망의 표현이다. 참을 수 없는 결핍에 시달리다가 욕망에 완전히 잠식당해 죽음으로 뛰어들고, 앙상한 주검으로 남는 것.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조연을 통해 암시된다. 주식으로 빚을 졌으면서도 계속 주식을 하기 위해 애인에게 빚을 내라고 닦달하는 형사. 그는 돈에 기갈이 들고, 돈의 욕망은 결국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변종 연가시가 외국의 ‘먹튀’ 자본과 제약회사의 음모로 씨가 뿌려졌다는 설정은 사실적일 뿐 아니라 필연적이다. 거대자본이 한 축에 있고, 그들이 뿌린 씨로 욕망의 기갈에 시달리다 집단 자살로 내달리는 사람들이 다른 한 축에 있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있다.

감염자 수용소, 학교의 축소판?

의 국가는 자본 앞에선 무력하고, 감염자들 앞에선 폭력적이다. 정부는 감염자를 안전하게 관리한다며 격리 수용하지만, 진짜 이유는 감염자들이 물에 뛰어드는 광기로 인해 사회 전체로 공포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국가는 감염자들을 체육관에 몰아넣고 가족과도 분리시키고 휴대전화도 빼앗는다. 감염자의 공포가 외부로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부는 감염자들이 자살하지 않도록 물리적 통제만 할 뿐, 감염자들이 어떤 고통과 공포를 느끼는지에는 무심하다. 고립된 공간에 모여 타는 목마름을 참아가며, 옆 사람이 자살 충동으로 발작할 때 나도 같은 충동으로 미칠 것 같은 상황, 마침내 옆 사람이 쓰러지면서 내뿜는 기생충에 내 안에 있음을 알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실체를 확인하며 느끼는 패닉. 이런 상황에 가장 공감할 관객이 누굴까? 학교라는 수용소에 갇힌 청소년들이다.

기생충에게 뇌와 몸을 점령당한 채 충동으로 날뛰는 감염자들은 좀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는 국내에 착종되지 못한 좀비영화의 변종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할리우드 영화의 좀비들이 살육의 욕망에 휩싸이는 것과 달리, 의 감염자들은 집단 자살로 내달린다. 미국처럼 총기 난사가 일어나진 않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로 집단 자살을 향해 치닫는 한국 사회의 변종 좀비영화로 꽤 걸맞지 않은가.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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