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장동건씨 부인이라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 더구나 ‘내가 고소영인데…’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채 하루 3번 체중계에 오르내리며 재기를 도모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지난 7월9일과 16일 방송된 SBS (이하 )에서는 오랫동안 입 다물어온 ‘침묵의 여배우’ 고소영(사진)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냈다.
여배우들 세계를 구축할 만큼의 세월고소영이 처음부터 말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기억이 맞다면, 십수 년 전 한 여배우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한 고소영은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앞에 자동차가 줄지어 있어서 어느 차를 타야 할까 고민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드라마 이후 패션계에 ‘고소영 따라하기’가 유행하자 잘라 말했다. “내가 예쁘니까 따라하겠죠.”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로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역할을 맡았던데다 일상에서도 돌려 말하는 법 없는 확실한 자기표현으로 ‘되바라졌다’는 이미지가 커지자 고소영 개인의 이야기는 자취를 감췄다. 기자와 인터뷰할 때도 서면 인터뷰만 하든가, 아니면 개인적인 질문은 잘라버리기로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설명했다. “나는 배우이기 때문에, 쇼프로 같은 데 나갈 필요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거다.” 말하자면 전지현, 김태희 등의 신비주의 전략의 원조였던 셈이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서 긴 시간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 고소영은 달라졌다. 1990년대 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약속하지 않은 일에 대해 확실히 싫다고 대답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라고 반문하던 그는 이제 “대본은 소설책 읽는 것처럼 했고, 몸은 못하겠고 그러면서 갈등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제 잘못이다.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예전엔 “내가 인기 있는 이유는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번 에 나와선 “작품도 안 되고 여자배우로서 생명을 잃은 것 같다”고 우울을 드러낸다. 이런 변화에는 물론 세월이 한몫한다. 영화에서 아기가 무뇌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절규하는 어머니 역할을 맡았을 때 한 인터뷰에서도 “아기보다는 강아지가 더 예쁘다”고 했던 그가 이젠 자식 자랑에 넋 놓을 만큼의 세월이다. 그리고 여자배우들의 운신 폭이 넓어질 만한 세월이다. 무엇보다 전도연이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고현정이 드라마 으로 다시 정상을 밟는 등 나이 든 여배우들의 세계를 구축할 만큼의 세월이다.
여배우들의 매뉴얼 된 ‘고현정 전략’
여배우는 작품에서 자신이 맡는 캐릭터 이상이다. 재벌가의 며느리였던 현실과 청순한 이미지의 모순 사이에 갇혀 있는 듯하던 고현정은 MBC 예능 프로그램 에 출연해 전환점을 마련했다. 흔히 여배우들이 그렇듯 자기방어와 은폐에 힘쓰는 대신 화통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 보였다. 솔직함과는 다른 차원의 전략이다. 망가지지 않고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전략, 증권시장식으로 이야기하면 침체된 과거형 브랜드를 현재형 브랜드로 ‘턴어라운드’한 고현정의 전략은 지금 나이 든 여배우들에게 매뉴얼이 된 듯하다. 예전엔 결혼으로 활동을 중단한 여배우들은 ‘망가지는 역할’을 거쳐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브라운관에서 나이 들었다. 경제력이 아쉽지 않다면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결혼하고 돌아온 여배우들은 ‘억척스러운 아줌마나 인자한 어머니 역’을 맡지 않고도 자신의 브랜드가 돋보이는 배역을 추구한다. 고현정의 뒤를 이어 ‘여배우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는 ‘아침방송 스타일’을 멀리하고 울퉁불퉁한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김희선도 얼마 전 채널 tvN의 예능 프로그램 에 출연해 착한 며느리·엄마 대신 적당히 껄렁껄렁한 자신을 공개했다. ‘된장녀’라거나 알코올중독자라는 소문에 눌려 있던 고소영은 에서 “술을 물 마시듯 하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약점을 당당하게 읊는다.
배우로서의 고소영은 1990년대에 갇혀 있었다. 그는 드라마 에서 고현정의 동생 경서 역을 맡아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기표현도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신세대들을 ‘고소영족’으로 포섭했다. 충무로로 발을 넓혀 찍은 영화 와 에서도 신세대들의 롤모델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그뿐, 그 뒤 계속되는 작품 실패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조차 공정성 시비가 거셌다. 당시 청춘이던 신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자 고소영은 영화가 아닌 광고에서, 여배우가 아닌 소비의 아이콘으로만 존재했다. 편집장 강명석은 “고소영은 광고를 효과적으로 소화할 여배우를 찾는 시대와 작품 전체를 책임질 수 있는 카리스마와 연기력을 여배우에게 요구하는 시대에 걸쳐 있는 배우”라며 “고소영은 변화한 시대의 대표적인 수혜자이자 피해자”라고 한 일이 있었다.
캐릭터 고스란히 가져갈 배역 원해
“대중 앞에 설 용기를 잃었어요.” 그러나 그냥 사라질 고소영이 아니다. 방송작가 백현락씨는 “고소영의 욕심은 연예계에서 알아준다. 중앙대 후배이자 광고계 라이벌 김희선이 누드 사진집을 낸다니까 조세현 작가를 찾아가 자기를 먼저 찍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또 영화계 라이벌 심은하가 연기 변신으로 각광받는 데 충격을 받아 한때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연기 공부에 전념했다”()고 했다. ‘인기가 곧 권력이고 계급인 나라’에서 ‘고소영 브랜드’ 리모델링은 이미 시동을 걸었는지 모른다. “요즘 토크쇼는 그렇게(재미없게) 하면 안 돼요.” 고소영은 고소영이다. 에서 빈틈없고 도도한 앞모습과 허술한 실상을 탈탈 털어 보인 그는 자신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가져갈 배역을 원한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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