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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을 꼼지락거리자

등록 2012-07-10 17:00 수정 2020-05-02 04:26

옛적 북미 대륙 퀘벡에 살았던 인디언 크리족은 대대로 자손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인생은 언제나 끝나지 않는 시련이다, 인생은 늘 물질과 대립한다.’
그렇다. 삶은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울화통 터지는 물질적 현실을 밥 먹듯 체험한다. 실업과 양극화, 학벌·이념 파벌 대립 같은 뒤틀리고 묵은 강박이 시시각각 우리의 인격과 영혼을 결박해온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그토록 우울해하고 고뇌하는 건 우리들, 인간의 본질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유전자로 간직한 우리는 내내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꿈꾼다. 여행에서 돈 주고 가이드를 사서 떠나는 몸의 공간 이동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 곳곳을 향해 어디든 우리 정신이 떠날 수 있게 해주는 또 다른 교통수단, 바로 책이 존재한다. 책에서 우리는 세계와 자아·타자가 빚어내는 온갖 요지경을 겪으며, 세상 안팎을 움직이는 여러 갈래의 이치를 발견한다. 그래서 책은 물화된 자유다.
책은 우리에게 자유와 더불어 선택이란 열쇳말을 던져준다. 지은이들이 책에 유령처럼 깃들어 담아낸 세상사의 갖가지 자양분을 어느 정도로 골라 섭취할 것인가, 머릿속에 들어온 책의 유령과는 어떻게 사귈 것인가. 평생 군중의 광기를 뜯어보는 데 몰두했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1905~94)는 소설 (1935)에서 그 극단적 선택을 보여준다. 책에 미친 페터 킨 교수의 이야기다. 2만5천 권의 장서가 들어찬 서재에서 ‘머릿속 세계’에만 골몰하는 이 남자, 그는 밤만 되면 온갖 유령이 날아와 책 위에 쭈그려 앉고서 책을 읽는 환영을 본다. 여기저기 유령들 책장 넘기는 소리가 그의 귀를 때린다.
현실 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페터는 끝내 서재를 불사르고 자살해버린다. 작가는 1930년대 대공황기에 고립된 유럽 지식인의 번뇌를 암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 우리는 책 속에 깃든 유령을 터부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인간 삶의 모든 분야를 갈무리한 정보가 종이책과 전자책, 전자우편, 인터넷 등으로 날마다 우리 눈 속에 쳐들어온다. 이 거대한 지식의 유령은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말한 ‘시차적 관점’, 즉 독자들이 인생길에 서 있는 제각기 다른 위치의 관점에 따라, 그들의 삶을 역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모조리 이미지로 갈무리되는 사건과 현상이 우리 머릿속에 쐐기를 박는 이 시대에, 가장 긴요한 선택 가운데 하나는 조금이라도 책에서 몸과 정신을 ‘꼼지락거릴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최근 방한한 지제크가 강연에서 역설한 “냉소주의를 이겨내는 것”, 곧 무엇이든 질문하고 따질 수 있는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것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 조건이 아닐까.
지난해 6월부터 1년 사이 국내 출간된 책들 가운데 책면에 실렸던 양서들을 다시 소개한다. 숱한 분노와 탄식, 절망의 시간이 그사이 스쳐갔지만, 이 책들은 ‘그럼에도’ 세상은 소유와 정복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시간을 이겨냈던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 자신의 태도를, 자기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를 일깨웠다. 책들은 이런 마지막 자유를 고민하라고 권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책지성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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