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발화하는 존재로만 기능하려던 30~40대 남성이 소비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일찍이 그들을 알아봤다. 백화점 등 유통 브랜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앞다퉈 남성 소비 취향에 맞춘 마케팅 전략을 짰다. 신세계백화점은 최근 남성 패션 전문관을 열었고 이에 앞서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남성 전문 편집매장을 열었다. 구색은 당연히 남성 취향이다. 신사라면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는 갈색 옥스퍼드 슈즈가 진열대 위에 고고하게 놓여 있고, 비즈니스 문구, 나침반, 휴대용 술병, 모래시계 따위가 투명한 쇼케이스 안에서 반짝인다.
바람은 패션계를 거쳐 문화계로 옮아왔다. 직장인 여성 구매자 중심으로 형성된 출판시장에서 최근 들어 남성 구매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들이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르게 된 데는 시장이 더 이상 공략할 소비 계층이 없어 30~40대 남성을 블루오션 삼아 적극적으로 포섭한 까닭이 첫째 이유다. 둘째 이유는 좀더 근원적이다. 전통적 의미의 남성성·여성성이 2000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깨지며 다변화한 성별 특징이 변화를 불러왔다. 최근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은 이들 변화의 어떤 극단을 보여준다. 출판시장에서 비독자층이던 남성을 유혹하는 브랜드의 등장도 눈에 띈다. 민음사에서는 남성만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소설 브랜드 ‘펄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언니들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남성 중심의 시각이 여성에게 투사된 ‘된장녀’ 담론에서 보듯 여성은 그동안 소비 주체로 호명돼왔다. 그런 여성들이 이번에는 까탈스러운 발화가로 성숙해 대중을 향해 말하고 싶은 욕망을 품게 됐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영화 등에서 소비 주체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여성 화자에 대해 썼다. 그녀들은 이제 ‘말하는 입’이 되려 한다.
‘말하는 입’이었던 남성이 이제 ‘먹는 입’의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먹는 입’으로 호명돼왔던 여성은 이제 ‘말하는 입’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은 전후나 진화·퇴보를 따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전통적 관념에 얽매여 있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기 시작한 것이다._편집자
SBS 드라마 6회에서 김도진(장동건)은 친구 셋과 당구 게임을 하고 이런 대사를 읊는다. “지금 우린 게임비가 아닌 당구장을 차려도 차릴 두둑한 지갑을 가졌지만 열여덟에 그랬듯 욕설이 난무하고 당구 한 큐에 목숨을 건다. 왜냐구? 소년은 철들지 않는다. 다만 나이들 뿐이다.”
은 1972년생, 이제 막 불혹에 들어선 ‘꽃중년’들의 싱글 라이프와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다. 꽃중년의 남자 넷, 어딘가 익숙하다. 남성판 를 표방하겠다더니, 미국 드라마 의 언니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나 브런치를 하며 일과 연애 얘기를 공유했다면 에서 한국 남성화한 네 캐릭터는 곗날에 서울 강남 레스토랑에 모여 브런치를 즐기며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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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된 이들
‘당구장을 차릴 만큼 두둑한 지갑을 가진’ 이들이 게임비를 두고 진 쪽과 이긴 쪽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어른이 되어도 철들지 않는 소년에 대한 판타지와 40대 남성의 골드미스터 판타지를 두루 꿰고 있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어찌 보면 제대로 된 ‘픽션’이다. 김선영 TV평론가는 한 칼럼에서 “은 이를테면 1970년대 전후에 출생해 1990년대 대중문화를 이끌고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신세대들의 후일담 판타지다. 현주소가 아닌 후일담 판타지라는 것은, 드라마가 그리는 세계가 40대의 현실보다는 그 당시 신세대가 꿈꾸던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을 재현한 듯한 가상 우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라고 논했다. 1970년대 생들은 1980년대 고도 성장했던 한국의 풍요로운 시절을 보내고 1990년대 대학에 들어갔다. 김선영 평론가가 적은 대로 드라마는 1990년대의 문화적 풍요를 누리고 중산층이 붕괴하기 이전에 20대를 보낸 이들이 꿈꿔온 40대의 외형을 그리고 있다. 8회 방영된 박민숙(김정란)의 부부 동반 모임 장면은 현실과 비현실을 맞붙여놓음으로써 이 드라마가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박민숙 친구의 남편들인 40대 초·중반 남성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그 나이대의 남자들이다. 기존의 아저씨들과 4명의 꽃중년 아저씨들이 격하게 비교되며 드라마는 현실에서 더 멀어지는 듯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이 시점을 발빠르게 포착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에서 4명의 남자 주인공은 지금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호명된 이들이다. 이들은 ‘말하는 입’이라기보다는 ‘먹는 입’에 더 가깝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 사회적 욕망을 이미 성취한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딱히 비판할 의지가 없다. 대신에 이들은 먹고, 마시고, 소비한다.
농경 시대를 중심으로 전통적 관념의 남성은 생산의 주체이자 이로 인해 발화의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소비란 여성에게 어울리는 활동으로 이해돼왔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사회가 재편하며 더 이상 ‘근육의 힘’으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이미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나누어 편성된 사회는 쉽게 그 틀을 깨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서야 변화의 물결과 공고한 가부장이 맞물려 흔들리는 가운데 보수적 관념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 또한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남성은 더 이상 ‘말하는 입’만이 아니며 여성 또한 더 이상 ‘먹는 입’에 머무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이들 사이에 전후 혹은 진보와 퇴화의 관계는 없다. 시대적 편의에 의해 역할이 분배되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1970년대 생들은 이런 변화에서 최전선에 선 세대다. 더 이상 혹은 아직은 곤궁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형태의 대중문화를 맨 첫 번째 줄에 앉아 맞닥뜨린 이들이다.
눈치 빠른 시장은 이런 변화를 일찍이 알아봤다. 2005년 제일기획에서는 1970년대 출생자들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을 중요시하는 자기중심주의 경향을 보인다. △결혼에 대해서는 필수조건보다는 충분조건이라는 경향을 나타냈다. △현실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소비 성향을 보이며 브랜드에 대한 선호 경향이 높았으며 따라서 유명한 브랜드의 명품을 소비하기를 원했다. 유행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다. △해외여행을 즐기며 낯선 외국 문화에 대한 거리낌이 적고 개방적이다. 시장은 먼저 1970년대 여성을 골드미스라 칭하며 불러냈고, 두 번째로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남성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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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남성성에 얽매이지 않는 이유
문화소비 시장에서 주체는 여전히 여성이다. 하지만 남성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2012년 상반기 구매 고객을 분석한 결과 여성 61%, 남성 39%로 여전히 여성의 구매 비중이 높다. 그러나 예스24 최세라 팀장은 “2012년 상반기 30대 남성이 12.4%, 40대 남성이 13.3%로 전년 동기 대비 소폭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은 40대 여성이 1%포인트로 가장 많이 증가했으며 40대 남성이 0.9%포인트, 30대 남성이 0.6%포인트 순이다”라고 말했다. 30~40대 여성 연령층은 전체 구매자 중 44%를 차지하지만 자신은 물론 자녀의 도서까지 함께 구매하므로 남성 도서 구매자의 증가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어 최 팀장은 “올해 초 출간된 김정운 교수의 은 상반기 전체 7위를 차지했고 등 인문(고전), 사회, 역사와 문화 등 대표적인 중년 남성 타깃 분야 책의 인기가 대단했다. 남성 구매자층에서 30~40대 남성의 구매율은 각각 32%, 35%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민음사는 출판시장에서 비독자로 열외되었던 남성을 대상으로 한 브랜드를 내놓을 계획이다. 지난 5월29일~6월12일 민음사는 남성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소설 브랜드 론칭을 공표하고 브랜드명을 공모했다. 보름도 안 되는 새에 1100여 명의 응모자가 이름을 쏟아냈다. 민음사 편집부 양은경씨는 “최근 진행한 이벤트 중에서 꽤 높은 수준의 히트작이었다. (이벤트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성들의 참여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도 놀랍다”고 전했다.
7월 중 첫 책을 출간할 예정인 민음사의 남성 대상 브랜드 ‘펄프’는 30~40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그득하다. 출판사 쪽은 기업극화, 메디컬물, 하드보일드 수사물, 역사 추리 등의 내용을 담은 소설을 라인업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양은경씨는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1년6개월 정도 준비한 기획이다. 현재 출판시장은 여성 취향이 강하다. 유럽 작가들의 소설을 주요 타이틀로 내세우고, 연애 모티브의 책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소설 또한 대부분의 구매자가 여성이다. 이런 가운데 소외돼 있는 남성 독자들을 주목했다.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시드니 샐던, 존 그리샴의 소설, 무협물은 남성 독자를 포괄하는 장르였다. 만듦새 좋고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도서들이 남성 독자에게 호소력이 있었다고 본다.” 출판사는 1만원 안쪽의 가격, 지하철이나 버스 등 이동 중에 읽기 좋도록 가볍고 단출하며 직관적인 디자인 등 남성들에게 통하는 합리적인 저사양 도서를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선 이들, 갓 40대로 넘어갔거나 불혹을 눈 앞에 둔 1970년대생들이 전통적 관점의 남성성에 붙들리지 않고 2000년대 들어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이유는 단일하게 정의할 수 없을 듯 하다. 정신분석학자 이승욱 박사는 30~40대 남성이 소비 주체로 떠오르게 된 것을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관계에서 여성이 주도권을 쥐게 돼 잠재된 여성성이 발현한 것, 그리고 성비 불균형으로 남성이 경쟁력을 도모하며 외적으로 자신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며 여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소비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이승욱 박사는 한편으론 시장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시장은 소비자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물건을 팔려고 소비자를 개조해나가는 데 이르렀다.”
소비되느니 차라리 소비하는 삶 살겠다
이 박사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해석은 조금 서글프다. “지금의 30~40대 남성은 아버지와 삼촌 세대를 보며 정형화된 삶의 고단함을 일찍이 보고 느꼈다. 대부분은 결국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30~40대 남성은 그 윗세대보다 더 많이 삶의 정형성을 부정한다. 돈을 벌고 결혼과 제도에 얽매이고 결국은 스스로 소비되며 살아야 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이 소비될 바에는 스스로 소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선포하며 남성 소비층이 두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2000년대까지 군사정권, 문민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와 신자유주의에의 포섭 등 10년을 기점으로 정치·경제적으로 큰 변동을 겪었던 한국 사회의 특성이 남자의 변화를 불러왔으리라는 해석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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