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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강하다, 너무 세잖아

<돈의 맛>에서 임상수 감독 영화 세계의 ‘총결산’이 된 배우
등록 2012-05-24 11:42 수정 2020-05-03 04:26
시너지·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시너지·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윤여정은 한때는 고 김기영 감독의, 얼마 전까지는 김수현 작가의, 가끔은 노희경·인정옥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불렸다. 페르소나라는 말을 아무리 남용한들, 그의 작품 경력이 몹시 길다는 점을 고려한들, 한 배우가 이렇게 많은 창작자들의 페르소나일 수는 없는 법이다. 윤여정이 예전에 한 인터뷰를 보면, 김기영 감독은 젊고 도도하던 그 여배우에게서 “어딘지 청승맞은 면”을 발견하고 그를 스크린에서 피워올렸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는 새된 목소리로 사정없이 쏘아붙이는 대사들을 통해 거슬리지만 과히 밉지 않은 중년여자 캐릭터를 쌓아올렸다. 노희경 작가는 에 기고한 글에서 “‘미친년, 지랄하네, 염병, 이 자식아, 저 자식아’ 하는 막말조차도 (윤여정의) 입을 통해 뱉어지면 정이 뚝뚝 묻어나는 아픈 위안이 되거나 쓸쓸한 인생에 대한 정의가 된다”고 했다. 과연 철없는 주부(드라마 )거나, 까칠한 여배우(드라마 )거나 그가 하면 이미 인생의 쓸쓸함을 보아버린 사람의 대사로 변해버린다. 배우 윤여정은 어느 누구 하나의 페르소나가 아니라 이들이 그리는 여자들의 우주에서 독특한 빛을 발하는 행성인 셈이었다. 그런데 5월17일 개봉한 임상수 감독의 영화 에서 윤여정이 차지하는 위치는 남다르다.

김기영·김수현·노희경·인정옥의 페르소나

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서로를 길들이고 질식시키며 살아가는 대한민국 최상위층 사람들의 이야기다. 윤 회장(백윤식)은 돈 때문에 백금옥(윤여정)과 결혼했고 원없이 돈을 쓰며 집안의 지저분한 일을 처리한다. 백금옥과 윤 회장의 아들 윤철(온주완)은 “할아버지한테 받은 60억으로 200조원이 넘는 그룹의 재산을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증여받는” 진화된 재벌 2세다. 노회장(권병길)은 은퇴했지만 제국의 영화가 지속되도록 검은 뒷거래를 지휘한다. 임상수 감독은 제작보고회 때 한 인터뷰에서 “이전 영화 에서 그린 대한민국 최상위층 사람들의 모습에 현실성과 구체성을 넣겠다”는 이야기로 이 영화의 의도를 설명한 일이 있다. 현실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최상위층의 벽은 넘겨다보기 어려울 만큼 공고한 것과는 달리, 영화 속 이 남자들의 세계는 아슬아슬하고 허약하다. “우리가 없는 한국이 상상이나 되냐”는 아들이나, “죽은 여배우에게 접대받은 일이 있던” 아버지나,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시든 육체로 살인까지 배후 교사하는 할아버지나, 지나친 탐욕 탓에 그들의 존재는 한층 기괴해 보인다. “빌어먹을, 봉투를 거부할 자유도 없어.” 백씨 집안의 충직한 비서로, 그룹의 은밀하고 검은 뒷일을 도맡아 하다 점점 돈의 맛을 알아가는 주영작(김강우)도 마찬가지다.

‘돈의 맛’은 남자들의 혓바닥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백금옥이라는 강한 뒷맛이 남는다. 아버지 노회장에게 젊은 여자들을 상납한 덕에 그룹의 최고 권력을 잡은 여자다. “너 왜 이래, 내가 늙었다고 그래? 늙은 여자랑 자서 불쾌해?” 백금옥이 지닌 것은 탐욕이나 권력욕만은 아니다. 욕망에는 욕망, 모욕에는 모욕으로 갚아준 흔적들을 자기 안에 주름처럼 고스란히 안고 있다. 포스터에 나왔던 백금옥이 주영작의 몸을 훑어내리는 장면은 육감적이라기보단, 자신을 힘껏 모욕하고 있다는 느낌, 치렁치렁한 옷과 앙상한 몸으로 이 비루한 행사에 힘을 다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씨는 이를 “윤여정은 더 이상 전형적인 가부장 구조가 유효하지 않은, 남성들의 질서를 훼손하는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며 “아마도 이는 임상수 감독의 전작에서부터 구축된 이미지의 총결산일 것”이라고 평했다. 윤여정은 2003년 에서부터 임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윤여정은 남편이 죽고 나자 아들·며느리에게 “남자친구가 있다. 그 남자랑 섹스도 하고 심지어 오르가슴도 느낀다”며 훌훌 떠나버린다. 2005년 에서는 딸의 몸을 팔아 부와 권세를 챙기려는 여자로 나오면서도 암살과 쿠데타의 뒷이야기를 관찰하는 위치를 부여받는다. 영화는 윤여정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영화 은 임상수 감독이 2010년에 만든 영화 의 확장판이다. 영화 에선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다”는 눈길로 주인의 뒷모습을 싸늘히 쳐다보면서도 은이(전도연)가 임신한 사실을 주인집에 알리며 권력에 적극적으로 봉사한다. 그리고 은이가 불에 타기 직전 그 집을 떠나버린다.

“남성들의 질서를 훼손하는 캐릭터”

그러나 에서 권력을 지닌 윤여정은 더는 떠나지 않는다. 윤여정은 ‘우리 엄마’라기보다는 육체와 욕망을 지닌 ‘누군가의 엄마’다. 자신도 통속성 한가운데 발 담그고 통속적인 욕망을 냉소하는 캐릭터다. 탐욕의 파국을 내다보는 누군가의 페르소나다. “엄마는 몸만 여자지, 음탕한 남자와 다를 게 뭐가 있어?” 에서 딸 나미(김효진)의 말은 표적을 잃고 떨어진다. 거세된 남자들의 세계, 방향 없이 뿌려지는 돈의 세계에서 그만이 공고하게 나아갈 곳을 안다. “강하다. 너무 세잖아.” 강제로 백금옥과 하룻밤을 보낸 주영작의 결론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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