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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함이 우리를 밀어왔다”

심광현의 동지·손자희의 남편, 강내희 교수가 말하는 창간부터 <문화/과학> 지켜온 힘
등록 2012-05-10 15:50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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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도 돈 안 되는 잡지, 20년씩이나 만들어온 뚝심이 대단하다’고 했더니, 대뜸 너털웃음부터 지었다. “허허. 이리 오래 만들게 될 줄 난들 알았겠어요?”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1992년 여름 계간 을 창간한 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함께 줄곧 잡지의 편집과 발행을 책임져왔다. 사람들이 이란 제호에서 강내희·심광현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오기 반 책임감 반’으로 잡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20년 동지, 심광현을 만난 사연

“그 많던 좌파 잡지·학술지가 자고 나면 하나씩 폐간하는데, 우리라도 오래 버텨야겠더라고요. 한때 세계 진보운동의 희망으로 주목받던 나라에 변변한 좌파 잡지 하나 없다면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강 교수가 진보 학술지 출판에 뜻을 둔 건 1987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부터다. 당시 한국 사회는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급진적 사회운동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강 교수는 이들 운동을 이론적·담론적으로 뒷받침할 지식 생산 활동이 중요하다고 봤다. 출판사 ‘터’를 차린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출판사에선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서를 주로 냈다. 당시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선 막 유입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한 화두였다. 국내 학자들의 논문과 좌담을 엮은 을 내는 과정에서 소장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심광현 교수와 만났다.

“심 교수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에 대해 썼는데, 글에서 광채가 났어요.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1991년 여름 저와 아내가 심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뜻이 통했죠. 그해 가을 학술 심포지엄을 함께 기획했고, 당시 함께했던 연구자들을 규합해 편집위원회를 꾸린 거죠.”

강 교수는 초창기 이 젊은 연구자와 대학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힘을 매주 토요일 열던 편집위원 세미나에서 찾았다. “1년에 네댓 번 빠지고 매주 세미나를 했으니 대단했죠. 주제도 제한이 없었어요. 초창기 이 특집으로 다뤘던 언어·욕망·육체·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다 세미나에서 나왔습니다. 참 무모했죠. 전공 분야도 아닌 온갖 주제를 다 건드리며 글을 써댔으니.”

실제 은 어지간한 특집 글은 편집위원들이 다 썼다. 편집진의 문제의식을 소화해 원고를 집필할 외부 필자를 찾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다룬 주제는 새롭고 파격적이고 논쟁적이었다. “안팎의 비판도 있었죠. 공부도 깊이 안 하고 막 쓰는 거 아니냐. 저는 학자로서 그런 비판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지만, 우리가 근대의 분과학문 시스템과 담론 생산 관행에 발목을 잡혔다면 은 활력을 잃고 단명했을 겁니다.”

이제야 답하는 재정에 대한 억측

인터뷰 말미, 강 교수는 의 재정과 관련된 세간의 억측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바깥에선 제가 부친한테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아 출판사업을 하는 걸로 아는데, 아닙니다. 1990년대 말 일본 부동산 버블이 붕괴해 부친이 일본에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이 다 날아가버렸거든요. 남은 거라곤 연희동의 단독주택 하나예요. 사실 잡지 이 지탱되는 건 순전히 아내 손자희 여사의 가사노동을 착취한 덕입니다. 기획부터 청탁, 원고 수거, 교열, 편집까지 손 여사의 무급노동에 온전히 빚지지 않은 부분이 한 군데도 없거든요.”

강 교수는 현재 연구 학기를 맞아 중국 상하이에 머물고 있다. 인터뷰는 5월3일 오후 전화로 진행됐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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