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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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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주문

오디션 프로그램 재도전 판타지… 더 많은 실패 경험을 요구하는
제작진과 우승 향해 운명 내거는 ‘중고 신인’들이 공생하는 장이 돼
등록 2012-04-20 15:59 수정 2020-05-03 04:26

엠넷 시즌2 우승자 허각과 시즌3 우승자 울랄라세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오디션에 참가하기 전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노래를 해왔고 가수로 불렸던 사람들이다. 허각은 환풍기 수리공으로 일했지만 여러 대회에 출전하며 행사장 가수로 일했고, 울랄라세션은 경기도 미사리 등지에서 꾸준히 가수 활동을 하며 그중 두 멤버는 자비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시즌1에서는 서인국이 생방송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승을 거머쥔 데 반해, 허각이나 울랄라세션은 생방송 이전부터 이미 가수로서 어느 정도 완성돼 있었다.
오디션이 아니더라도 가수가 될 수 있는 길은 많다. 하지만 데뷔를 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면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 사이에 개입하는 기획사는 나이·외모를 비롯해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는 만큼 장벽도 높다. 1차 경쟁에서 밀려나 대중의 눈에서 멀리 있는 이들을 ‘중고 신인’이라고 부른다면, 지금 오디션 프로그램은 점차 진짜 신인이 아닌 중고 신인들이 재도전을 벌이는 장이 돼가고 있다. 기존 기획사와 방송사라는 높은 진입장벽을 뚫지 못한 중고 신인들에게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마지막 기회가 되는 셈이다.

설 곳 좁아진 ‘원석’ 지망생들

오디션 프로그램은 전성시대를 지나 ‘중고 신인’들의 재도전이라는 ‘시즌2’에 들어선 인상이다. 언젠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타지는 더욱 강화된다. 재도전자들이 화제가 된 채널 엠넷의 <보이스 코리아>(위)와 SBS <기적의 오디션>.

오디션 프로그램은 전성시대를 지나 ‘중고 신인’들의 재도전이라는 ‘시즌2’에 들어선 인상이다. 언젠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판타지는 더욱 강화된다. 재도전자들이 화제가 된 채널 엠넷의 <보이스 코리아>(위)와 SBS <기적의 오디션>.

엠넷 는 이런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오디션이다. 심사위원들이 출연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 목소리로만 평가한다는 ‘블라인드 판결’은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한다는 오디션의 판타지를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현직 보컬 트레이너나 유명 기획사의 오랜 연습생을 비롯해 이미 음원을 발표해 가수 활동을 한 적 있는 도전자까지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그들 중 허각의 쌍둥이 형이자 싱글 음원을 이미 출시한 바 있는 허공은 생방송에까지 진출했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SBS 에서는 이미 꽤 많은 드라마에 출연한 바 있는 배우가 역시 유명한 배우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이유로 도전하기도 했다. 아마추어를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원석을 발견하고 그들의 성장 가능성을 재던 시기는 지났다. 이미 프로로 인정받은 경우에도 오디션은 유명세와 더 큰 무대를 향한 기회이며, 운명을 걸어볼 만한 도박이다.

지금 오디션 프로그램은 중고 신인들의 재도전이면서도 도전이 무한 반복되는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경쟁적으로 신설되고, 자리를 잡은 프로그램은 시즌이 이어진다. ‘지망생’들에게는 기회의 수가 늘어난다. 이미 다른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데뷔하지 못했던 이들이 자리를 옮겨가며 재도전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 오디션에서 다른 오디션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흔하고, 시즌을 거듭해 재도전하기도 한다. 시즌3에서 톱10에 올랐지만 편집에 반발해 이탈했던 예리밴드가 한국방송 시즌2에 출연할 예정이다. 시즌1에 출연했던 아이씨사이다는 시즌4 예선에 지원했다. 그리고 본선에는 출전하지 않기로 했지만 시즌3에서 슈퍼위크 단계에까지 올랐던 초등학생 손예림은 시즌4의 1차 예선에 다시 참가하기도 했다. 특히 잊혀진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이 오디션을 통해 자기 홍보를 하려는 경우도 늘어가며 오디션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패자부활전이 된다.

반복적으로 오디션에 재도전하는 경향 이면에 여전히 유효한 것은 오디션에 대한 판타지다. 출신은 물론 과거 이력이 어떻든 간에 내가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고, 경쟁의 부담을 이기고 언젠가 그 꼭대기에 오르면 인기와 명예, 돈을 한 번에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이다. 떨어진다 해도 잃을 것이 많지 않으니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주문을 걸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거기에 더해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오디션에 발을 들여본 이들은 그 언저리에 계속 머문다. 이런 환각 효과는 신인과 중고 신인, 그리고 잊혀진 유명인들에게 모두 동일하게 작용한다.

재도전 아닌 재실패의 기회일수도

5월 방송을 앞둔 한국방송 은 이런 흐름의 정점이다. 이미 아이돌로 데뷔했지만 대중의 사랑과 지지를 받지 못했던 아이돌들이 경쟁해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은 멤버들이 다시 아이돌 그룹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미 한 번 경쟁에서 밀려본 도전자들의 경쟁은 분명 치열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실은 재도전이 아니라 재실패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아도 결국 그 열매를 가질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알면서도 도전자들은 또다시 기회를 얻기를 원하고,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드라마를 위해 더 많은 실패와 고통을 경험한 이들을 원한다. 서로에게 줄 것은 많지 않지만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재도전을 거듭하는 도전자들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렇게 공생하고 있다.

윤이나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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