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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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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 끝, 타워크레인 끝에 매달린 봄

자본의 폭압에 묻힌 노동자의 죽음… 탄광 사고, 강원랜드, 타워크레인 농성 등 묵직한 소재 엮어 무대에 올린 연극 <878미터의 봄>
등록 2012-03-31 11:41 수정 2020-05-03 04:26

3월20일부터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은 탄광 사고, 강원랜드, 타워크레인 농성 등 사회성 짙은 소재를 다룬다. 대중의 감각적 취향에 영합하고 시각적 현혹을 선호하는 최근의 공연 현실에서 예외적으로 묵직한 사회적 주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제1회 벽산희곡상을 받은 젊은 작가 한현주와 2010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받은 류주연은 사회적 소재를 직접적이고 역동적인 드라마로 증폭시키려 하지 않는다.

연극 <878미터의 봄>은 지하 갱도와 타워크레인의 현실을 포개며 희망을 말한다. 캄캄한 현실을 관망하거나 잊어버리려 했던 주인공이 기나긴 반성의 터널을 빠져나온 덕분이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878미터의 봄>은 지하 갱도와 타워크레인의 현실을 포개며 희망을 말한다. 캄캄한 현실을 관망하거나 잊어버리려 했던 주인공이 기나긴 반성의 터널을 빠져나온 덕분이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허구의 인물에 비친 김주익

연극이 현실보다 강화된 허구의 공간임이 분명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현재의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상상의 세계보다 훨씬 더 극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을 현실에서 목도하게 되는가 하면, 희망버스는 김진숙이 타워크레인에서 309일 만에 환호 속에서 내려오게 하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 발언이 금지된 과거의 우리 사회에서는 극장이 현실보다 더 비판적인 발언의 장이 될 수 있었지만, 억압이 예전보다는 간접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세대의 작가·연출가들에게 극장은 사회 현실에 대한 성찰과 그 성찰을 육화하는 반성적 자리로서 기능한다. 이 때문에 이 작품 속에서 작가와 연출가는 길고 어두운 갱도를 지나가듯 더디고 조심스럽게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리고 관객은 이 어두운 갱도를 지나는 체험으로 초대받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그 어두운 갱도의 끝에 밝은 봄의 빛을, 희망 실현의 체험을 극장이라는 특수한 시공간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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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환기하는 ‘878미터’는 작품의 허구적 배경이 되는 어느 탄광에서 과거에 발생한 갱도 폭발 사고 지점의 깊이다. 주인공 준기의 아버지 용만은 이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 뒤 주검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회사에서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용만의 구출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여하기를 꺼렸고 보상금을 더 주는 형식으로 관련자들을 회유해 빈 관으로 가짜 장례를 지냈다. 용만은 여전히 878미터 갱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용만의 아들 준기가 카지노 등 향락시설 확장 때문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려고 17년 만에 탄광촌을 방문하고, 사실을 감추려는 옛 이웃들의 방해에도 진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줄거리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측되듯이 준기에게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 진실에 다가가려는 준기의 대립이 이 극의 초점은 아니다. 회사 쪽의 회유로 용만의 장례를 허위로 치르게 한 당시 소장 근석은 현재 치매를 겪고 있으며 17년 전 상황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사고로 장애를 얻은 광부 기철은 소장 근석이 회사 쪽과 결탁했던 사실을 빌미로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있다. 근석의 딸이며 어린 시절 준기의 친구인 우영은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이후 아버지 대신 기철의 노름돈을 대주고 있다. 용만이 지하 878미터의 갱도에 여전히 갇혀 있듯이, 이들의 삶 또한 거짓으로 덮어버린 지하 갱도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17년간 아버지가 묻혀 있는 이곳을 한 번도 찾지 않았듯 준기는 과거를 잊고자 한다. 한편 방송사 PD인 준기는 타워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철강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외압으로 중도에 포기한 상태다. 그는 김철강마저도 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런 와중에 김철강이 타워크레인에서 투신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준기가 망각하려는 이 두 죽음을 겹치게 하는 것이 작가와 연출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것은 이용만과 김철강, 그리고 지하 878미터 갱도와 지상 50미터의 타워크레인, 17년 전의 과거와 현재의 겹침이다. 허구 인물 김철강과 타워크레인에서 죽어간 실제 인물 김주익(2003년 회사 쪽의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에 올라 129일간 농성하다 자살한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겹침이고, 따라서 허구로서의 연극과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의 겹침이기도 하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우영을 찾아 내려간 갱도에서 준기는 이제껏 망각 속에 묻어둔 죽은 아버지를 불러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나오지 못했던 갱도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한 그를 보며 관객은 살아 있는 용만을 보게 된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시선을 타워크레인으로 가정되는 공간으로 향할 때 그곳에서 죽은,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김철강을 다시 용만의 자리에서 보게 된다. 용만은 이렇게 지하 갱도로부터 솟아나 고공 크레인의 위로 날아올라, 미래의 봄을 지시한다. 봄은 이렇듯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시간이며 의 관극은 이와 같이 변화하는 시간을 체화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연극 은 4월8일까지 공연한다.

조만수 연극평론가·충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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