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쯤 전, 대부분의 가정이 아직 유선전화기를 쓰고 있을 때였다. 부자 친구의 집에서 바텔의 무선전화기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선이 없어도 전화를 쓸 수 있다니, 충격이었다. 이후 삐삐나 휴대전화가 보급될 때조차 그때만큼의 쇼크는 없었다. 내 기억 속에서 무선 시대의 시작은 바로 그 무선전화기였다. 하지만 최근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 친구가 커다랗고 투박한 무선전화기처럼 생긴 뭔가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뒤늦게 그것이 아이폰용 케이스라는 걸 알았다. 그 케이스를 사용한 덕분에 볼륨 버튼을 누를 수 없고, 충전도 못하며, 카메라 역시 사용할 수 없다. 또 다른 친구는 그 광경을 보고 싫은 소리를 했다. “바보도 아니고, 왜 저런 이상한 걸 써?” 하지만 나는 절반만 동의했다. ‘바보 같지만, 왠지 멋있다.’
스마트폰 안에 1980년대 있다
요즘 포털 사이트에서 ‘복고, 케이스’라는 검색어를 치면 꽤 많은 상품이 쏟아져나온다. 그 옛날 ‘탱크폰’ 같은 디자인도 있고, 공중전화 수화기처럼 생긴 것도 있다. 스마트폰 관련 기기들을 들여다보면 이상하게도 아날로그적 조작감을 선사해주는 제품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전 스테레오 카세트 같은 외관을 한 스마트폰용 스피커 독(Dock)도 마찬가지다. 기기뿐 아니다. 소프트웨어에서도 복고 열풍이 거세다. 예를 들어 최근 앱스토어의 상위권을 차지한 애플리케이션들을 살펴보면, 다수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은 ‘앵그리 버드’는 스마트폰의 터치 조작을 극대화한 게임이었지만, 실제 그 내용을 살펴보면 10여 년 전 엄청난 인기를 모은 ‘포트리스’와 거의 비슷하다. 최근 30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게임 ‘탭소닉’도 1990년대 아케이드센터를 휩쓸었던 ‘EZ 2 DJ’라는 리듬 게임과 흡사하다(다들 단순하고 직관적인 조작이 가능한 게임이다). 최근 앱스토어 유료 순위를 초토화한 ‘숙면닥터’는 귀에 끼기만 하면 전교 1등을 보장해준다던(경험자로서,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엠씨스퀘어’와 거의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다. 촬영한 사진을 복고풍으로 꾸며주는 애플리케이션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패션이나 문화 쪽에서는 주기적으로 복고 열풍이 몰려왔지만, 그런 트렌드가 정보기술(IT) 분야에까지 돌아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IT 분야는 이를테면 ‘앞으로 전진!’만을 외치는 돌격대 같았으니까. 대체 이 스마트한 기계를 사용하는 이용자들은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가.
표지 모델 징크스에 걸린 스마트폰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유명한 스포츠 잡지인 의 표지 모델이 된 선수는 운이 나빠진다는 얘기다. 설마 하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는 않는다. 실제 미국에서 그 이유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진실은 아주 간단했다. 스포츠 선수들은 좋은 흐름을 타서 성적이 탁월해질 때 표지에 오르기 마련인데, 일정 기간 엄청난 활약을 보인 뒤 ‘평균회귀 효과’ 덕분에 슬럼프가 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평균회귀 효과는 두 변수에 상관관계가 있을 때, 한 변수가 극단적 값을 보이면 다른 변수는 더 평균에 가까운 값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통계적 팩트다. 올해 유난히 실적이 좋았던 영업사원, 유난히 성적이 좋았던 아이는 기대와 달리 내년에는 그만큼의 성적을 올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이용자가 드디어 2천만 명을 넘었다. 전 국민의 50% 이상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셈이다. 하루아침에 표지 모델이 된 스마트폰도 자신의 보급 속도가 아찔한 것일까? 평균회귀를 추구하는 탓에 스마트폰에 복고풍 취향이 스며들고 있는지 모른다. 스마트폰은 문자와 전화만 가능하던 과거의 휴대전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예민한 기계다. 10여 년 전 우리가 책상에 놓고 쓰던 PC보다 높은 성능을 가진 컴퓨터가 이 손바닥만 한 크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용법이 컴퓨터를 쓰는 것만큼 복잡했다면 스마트폰이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아이폰의 등장이 놀라웠던 건 단순히 예뻐서가 아니라 모든 기능을 원터치로 사용할 수 있게 한 편리성에 있었다.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컴퓨터가 되면서 아이폰의 성공은 시작됐다. 그 단순함이야말로 애플이 만든 가장 큰 기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편리함이 사람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관리자는 이제 직장 안에서뿐만 아니라 휴가지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직원이 전자우편을 읽고 즉각적으로 응답하길 원한다. 쉬어야 할 시간에도 늘 곤두서 있어야 한다는 건, 그만큼 뇌가 피곤해진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필요 이상의 복잡성에 몸을 내던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예컨대 최근 하드웨어의 발전상을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 기술의 진보 속도는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 그 유명한 ‘무어의 법칙’(마이크로칩의 밀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이나 ‘황의 법칙’(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법칙)도 어느 순간 정체됐다. 그건 기술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 이상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3D TV가 처음 발매됐을 때 큰 화제가 됐고 문화적 충격이 컸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직까지도 시큰둥하다. 기술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굳이’ 3D까지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균형을 찾다
스마트폰 시대의 복고 트렌드는 눈이 돌아가는 발전의 시대에 과거의 단순함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드러낸다. 수렵 시절부터 인간의 DNA에 기록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그저 멍하게 흘려보낼 줄 알던 그 습성 말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무겁고 큰 기기를 달고 다니거나 옛날 게임을 두드릴 때, 사람의 뇌는 아찔한 속도감 위에서 균형을 찾으려 숨을 돌리는 중일 테다. 피로한 뇌를 대신해 손이 무게와 크기와 조작을 담당하며 불편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 모른다. 아아, 아무리 그래도 모든 걸 유신정권 시절로 돌이켜버린 ‘가카’만큼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기원’ 정보기술(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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