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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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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쪽지가 그리운 저녁이야

클레멘트 프로이트의 ‘그림블’
등록 2011-10-20 16:39 수정 2020-05-03 04:26

엄마.

이 소설을 읽고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 이 소설이 뭐냐고? 클레멘트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쓴 ‘그림블’이야. (미디어2.0+ 펴냄)이라는 책에 실린 소설이야. 성질 급한 엄마가 소설 제목만 읽다가 이 편지 읽기를 멈췄을까 걱정되는데, 어쩔 수 없어. 원제가 저렇거든.

어쨌든 이 책에는 닉 혼비라든지 조너선 사프란 포어라든지 닐 게이먼이라든지, 엄마는 별 관심 없지만 자기들 동네에서는 잘나가는 사람들의 단편소설이 실렸어. 어느 것 하나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어서 제목이 저리 길어졌대. 그치만 나만의 표제작을 세우라면 ‘그림블’을 꼽겠어. 를 쓴 조앤 K. 롤링도 엄지를 치켜세운 소설이래.

‘그림블’은 그림블이란 이름을 가진 10살쯤 먹은 소년에 대한 이야기야. 그림블의 부모는 집을 비울 때면 언제나 쪽지를 남겨. 이런 식으로. “홍차는 냉장고에, 샌드위치는 오븐에 있다.” 내가 그림블의 나이일 때, 엄마도 집을 비울 때면 항상 나에게 쪽지를 남겼었잖아. 이렇게. “학교 잘 다녀왔니? 엄마는 오늘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OO에 간다. 냉장고에 있는 빵하고 우유 챙겨 먹으렴. 사랑하는 엄마가.” 사실 엄마가 그다지 다정하게 말하는 성격은 아니잖아. 그래서 나는 엄마가 말로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학교 잘 다녀왔니?”와 “사랑하는 엄마가”가 너무 어색하지만 그래도 무척 보드라워서 쪽지를 여러 번 되뇌곤 했어.

이 소설은 사실 칼럼을 쓰기 위해 아껴뒀던 소설이야. 끊임없이 먹을거리가 등장하거든(소설을 쓴 클레멘트 프로이트는 소설가이자 유명한 레스토랑 평론가이기도 하대). 어느날 그림블의 엄마와 아빠는 쪽지 한 조각을 남기고 페루로 떠나(이들의 재기발랄하고 무심한 캐릭터가 내내 이야기를 이어가). 그림블을 위해 홍차와 샌드위치를 잔뜩 마련해뒀지만 꼬마가 어떻게 닷새를 두 가지 음식으로만 나겠어. 아이가 지루해할 것을 예측한 그림블의 부모는 그래서 이런 쪽지를 남겨. “위급 상황시 이곳으로 갈 것”, 그리고 5명의 이름과 주소가 이어져. 첫 번째로 적힌 주소는 “윌프레드 모스키토씨 뒷골목 29번지(벨은 두 번)”. 그림블이 그곳에 달려가니 앞문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어. “잘 왔다, 그림블. 우유통에 열쇠 있다.” 문을 열고 부엌으로 가니 “맘대로 먹으렴”이라는 메모와 함께 가공된 음식이 아닌 원재료만 가득 있어. 그림블은 그 재료들로 신문에 실린 레시피를 따라 코코넛 타르트를 만들어 먹어. 그리고 다른 집에 가서는 감자팬케이크도 만들어 먹고, 트라이플(포도주에 담근 카스테라의 한 종류래)도 만들어 먹어. 맛은 대체로 훌륭했나봐. 부엌은 엄청난 설거짓거리로 폭탄을 맞은 것 같았지만. 내가 그림블의 나이일 때, 나도 종종 그림블처럼 요리를 시도하곤 했잖아. 그러나 엄마가 남긴 쪽지에는 남의 집으로 가라는 지령이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 집 부엌이 폭탄을 맞은 지경이 됐지(예나 지금이나 나는 요리를 하면서 폭탄을 터트리지). 엄마가 화낼 게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어지를 줄은 알아도 치울 줄은 모르는 나이였으니.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이상 엄마의 쪽지를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아. ‘그림블’의 배경도 디지털화한 세계였다면 이야기는 훨씬 재미없어졌겠지? 다정했던 엄마의 쪽지가 그리운 저녁이야. 그런데 이 편지를 엄마가 읽을 수 있을까. 아빠는 우리 잡지를 정기구독하면서도 종종 포장도 뜯지 않고 책장에 올려놓더라.

사랑하는 딸이.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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