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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다

사회적 시선 담아온 주재환·임옥상·김용익…유머러스하고 넓은 보폭으로 삶을 성찰하다
등록 2011-09-30 12:08 수정 2020-05-03 04:26

세상은 지금도 상처만 줄까. 주재환(71), 임옥상(61), 김용익(64) 작가를 만났다. 사회적 시선을 담아온 작가들은 이제 이순이 돼, 또는 고희가 돼 세상을 본다. 여전히 이들은 차갑고, 뜨겁고, 혼란스럽다. 공통점은 없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는 그들을 한 틀에 묶기는 쉽지 않다. 이들은 그 어떤 때보다 더 또 다른 형태의 대화를 기다린다.

 주재환, <현기증 #.17>, 70x47cm, 잉크젯 프린트, 2011 트렁크갤러리 제공

주재환, <현기증 #.17>, 70x47cm, 잉크젯 프린트, 2011 트렁크갤러리 제공

흔들리는 생활, 현기증처럼

주재환(71) 작가의 개인전 ‘현기증’은 작가가 그간 무엇을 보고, 무엇과 싸우며, 어떻게 지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1980년대 민중미술 소그룹 ‘현실과 발언’의 멤버이자 90년대 ‘민족미술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주재환 작가는 민중미술 진영에서도 흔치 않은 형식적 실험을 보여줬다. 사진가 박영숙씨가 운영하는 사진 전문 갤러리에서 전시를 연 작가는 생애 첫 ‘사진전’에 대해 스스로 엉뚱하다고 평한다. 유머러스하고 발랄하면서도 날카로운 현실 발언을 가능케 했던 작가의 정신은 쉼없이 변화한 세상을 향해서도 특유의 화법으로 말을 건넨다.

“난 사진을 잘 안 찍는 사람이에요. 2년 전 박영숙 대표가 화실에 와서는 내가 워낙 작품 보관을 소홀히 하니까 유실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사진전을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정현종 시인의 시 ‘구두수선소’를 읽고는 거리에서 본 구둣방 이미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는 데서 이 작업을 시작했죠.”

그가 말하는 ‘현기증’은 무엇일까. 주 작가에게 최근의 사건들은 어지럼증을 불러왔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미국의 허리케인, 그리고 이상기후, 최근의 정전 사태까지 이전과는 달리 그 사건들은 규모뿐만 아니라 속도감까지 더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그 현상들은 TV와 인터넷 속에서 가속도가 붙어 휘청인다. “텔레비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나요. 모두가 일상에 파묻혀 있지만 생활은 흔들리는 것 같아요. 정치, 경제, 소비중독, 등록금 1천만원 시대에 비정규직 문제까지 현기증 시대가 가속화하고 있어요.” 길거리 구둣방을 돌며 액자에 시를 담아서 수선하는 공간에 놓고 찍었다. 인터넷으로 접한 정보로 작업세계를 늘리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고색창연한 구둣방을 보고 포토숍으로 정현종 시인의 시가 담긴 입간판을 만들었어요.” 주 작가는 장남인 만화가 주호민씨와 함께 컴퓨터 포토숍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새롭게 만들었다. 작가가 아들과 함께 놀이하듯 채집하고 붙여낸 이미지가 모여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둣방 세계가 됐다. 전시는 10월26일까지 서울 인사동 트렁크 갤러리에서 열린다.

민중미술 진영의 또 다른 작가 임옥상을 지난 9월1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났다. 8년 만에 열린 개인전의 마지막 날이었다. 환갑에 이른 민중미술의 대표주자인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다. 거대한 붉은 꽃과 흙을 재료로 빚어낸 작업도 특유의 향을 잃지 않았다.“기막히고 화나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어느 날인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 나가기 시작했죠.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 (웃음)”

임옥상, <광화문연가>, 오일 온 캔버스, 456x186cm, 2011 가나아트센터 제공

임옥상, <광화문연가>, 오일 온 캔버스, 456x186cm, 2011 가나아트센터 제공

현실의 모순 예리하게 드러내

작가의 사진 작업 연작 때문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 유머를 간직한 사진들은 지금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사진의 주인공은 모두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 임옥상이다. 에서는 “배추가 비싸면 배추 대신 양배추를 먹어라”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저울질하듯 양손에 양배추와 배추를 든 작가가 있고, 에서는 흰 국화 다발을 들고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부동자세의 작가가 있다. 현실의 광장에 뛰어든 작가는 근엄한 광화문 땅 위에서 근엄하지 않은 얼굴로 현실에 대처한다.

전시는 2010∼2011년의 근작을 다루지만, 30년 넘는 세월 위에 핀 꽃과 같다. 8년 만에 연 개인전 ‘임옥상의 토탈아트’는 가나아트센터 1·2·3전시실과 미루전시실을 아우르는 풍성한 규모였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에서 다양한 공공미술 작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면모, 그리고 땅과 흙, 철과 불을 소재로 한 환경 작업에 몰두하는 최근의 모습까지 전시는 작가의 뜨거운 가슴과 넓은 보폭을 보여준다. 똑같은 광장 위에서 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 작가 임옥상의 배우 같은 얼굴이다. “흙을 만지고 흙 위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또 다져쌓는 동안 무척 가슴이 벅찼어요. 관객이 제 작품을 통해 흙을 직접 만지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흙으로 벽을 만들어 또 흙으로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작품 위에는 생동감 넘치는 각기 다른 표정의 얼굴이 가득했다.

민중미술 진영의 작가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미술의 정치적·개념적 특성과 제도에 대한 고민을 실행해온 경원대 교수 김용익(64) 작가의 개인전에서도 앞선 두 작가 못지않게 동시대성에 관해 고민하는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서울 구기동의 아트스페이스 풀(10월14일까지)에서는 1970년대부터 개념주의 전위미술 작가로 미술 안팎의 문제를 성찰해온 김용익 작가의 전시 ‘김용익: 무통문명에 소심하게 저항하기’가 열리고 있다. ‘출판기념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현실문화연구)라는 근본적인 제목을 단 작가의 책을 내세워 작가가 미술에 관해 고민하고 분투해온 문제를 작품과 함께 글로 풀어낸다. 이라는 사진에는 외로운 기념비와 향이 보이고, 낡은 문틀 위에 휘갈기듯 분노하듯 먹으로 그려낸 에서는 작가가 무엇에 절망하고 그것을 어떤 체험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용익 <구제역으로 죽은 모든 짐승들의 외로운 넋>.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61.5X72cm, 2011. 사진 홍철기, 아트스페이스 풀 제공

김용익 <구제역으로 죽은 모든 짐승들의 외로운 넋>.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61.5X72cm, 2011. 사진 홍철기, 아트스페이스 풀 제공

미래에 관한 이야기

왜 ‘소심하게’ 저항하기일까. 김용익 작가는 말한다. “저는 페미니즘 신봉자예요. 남근주의적 가치관과 정반대되는 입장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왔어요. 한판 승부를 보기 위해 싸우려는 태도가 아니라 체제에 구멍을 내고 길고 깊고 집요하게 저항하는, 그래서 변화하며 삶에 스며드는 게 소심하게 저항하는 미술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작가는 “미술이지만 미술에서 벗어나려는, 미술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구체적인 삶의 성찰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며 “사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에 관한 이야기, 석유 문명 이후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 9월22일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렸던 학교 수업 프로그램과 연계한 김용익 작가의 대화 프로그램 에서도 미술관이나 갤러리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뼈 깊은 ‘미술하기’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작가는 내년 정년을 앞두고 있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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