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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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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 사이 펼쳐진 아름다운 가난

빈민촌 골목길의 살가운 풍경과 주민들의 애환을 평생의 테마로 삼은 김기찬의 유작 사진집 <골목 안 풍경 전집>
등록 2011-09-08 08:51 수정 2020-05-02 19:26
서울 아현동. 1989년 8월

서울 아현동. 1989년 8월

사진하는 동네 바깥에서 김기찬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름 석 자를 대면 “누구?” 하고 되묻거나 “최민식, 강운구는 아는데…”라며 겸연쩍어하기 일쑤다. 이럴 때 그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사진 봤는데” 하며 반색하거나 “작가 이름이 뭐랬지?”라며 자세를 고쳐잡는 경우가 열에 아홉이다. 나물을 손질하는 아낙, 숙제 하는 아이들, 잡담하는 노파들, 흘레붙은 똥개 한 쌍 등 1970~80년대 한국의 대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빈민촌 골목길의 살가운 풍경이 그의 사진엔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 공지영이 달동네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쓴 자전소설 의 표지를 장식한 것도 1994년 김기찬이 찍은 서울 도화동 사진이었다.

집의 연장이자 소통의 공간

(눈빛 펴냄)은 김기찬이 이란 이름으로 낸 6권의 사진집과 미공개 유작 34점을 한데 모은 책이다. 실린 사진이 500점이 넘는다. 김기찬은 1968년부터 골목길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서울역 뒤 산동네인 중림동이 주요 무대였다. 처음 중림동을 찾던 당시를 회상하며 2003년 김기찬은 이렇게 적었다.

“1960년대 말.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카메라 한 대만 달랑 메고 서울역전과 염천교 사이를 오가며 삶에 지친 사람들을 찍다 흘러든 곳이 중림동 골목이었다. …중림동은 참으로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처음 그 골목에 들어서던 날, 왁자지껄한 골목의 분위기는 내 어린 시절 사직동 골목을 연상시켰고, 나는 곧바로 ‘내 사진 테마는 골목안 사람들의 애환, 표제는 골목안 풍경, 이것이 곧 내 평생의 테마이다’라고 결정해버렸다.”(589~590쪽)

30년 넘게 사진을 찍는 동안 골목길의 바깥 풍경은 현기증 나게 변했지만, 골목안의 시간은 정지돼 있거나 아주 느리게 흘렀다. 1990년대 중반에 찍은 사진이지만, 그 안에 담긴 모습이 2000년대보다 1970년대와 더 닮아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88올림픽을 치르고,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향해 달려가던 시절임에도 골목길의 아낙들은 길바닥에서 누룽지죽을 나누고, 아이들은 몰려나와 고무줄을 넘는다. 이들에게 골목길은 여전히 집의 연장이자, 소통의 공간이다.

이런 김기찬의 작업은 종종 최민식의 그것과 비교된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 도시의 가난이다. 최민식은 거리에서 조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해 찍었다. 김기찬은 산동네에 머물며 골목길이란 공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함께 사진에 담았다. 최민식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사진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순간)을 포착해 가난한 자의 삶에 대한 애정과 가난을 방치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반면 김기찬은 가난의 고통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쳐보이려 했다. 이를 두고 사회학자 윤일성은 ‘분노하는 자의 시선’(최민식)과 ‘그리워하는 자의 시선’(김기찬)의 차이로 구분하기도 했다.(‘도시빈곤에 대한 두 가지 시선-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 연구’)

김기찬에게 골목길이 그리움의 대상인 것은 그 자신이 산동네 골목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실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그는 고백한다. “어렸을 적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뛰어놀던 골목을 찾는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숲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리들의 고향의 모습이 떠오른다. 삶이 힘겹고, 딛는 땅이 비좁고 초라해도 골목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아끼는 훈훈한 인정이 있고, 끈질긴 삶의 집착과 미래를 향한 꿈이 있다.”(33쪽)

공동체를 향한 불멸의 소망

물론 가난한 자들의 삶이 왜 훈훈하고 아름답기만 했겠는가. 골목길은 세상의 모든 슬럼이 그러하듯 더럽고 냄새나고, 다툼과 악다구니가 넘쳐나는 비루함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기찬의 골목길 사진에서 남루와 비참의 기운이 풍겨나지 않는 것은 사진을 찍는 자의 마음과 시선이 부드럽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찾던 서울의 골목길이 급격한 재개발로 하나둘 사라지고 ‘제2의 고향’인 중림동마저 1997년 철거됐을 때, 작가의 그리움은 물리적 대상을 잃고 부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말년의 작품 활동이 골목을 떠난 사람들의 변화한 모습을 담는 데 바쳐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소설가 신경숙은 “과거에 묶여 있는 시간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한 노력”(478쪽)이라고 평가했지만,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던 작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작가의 슬픔이 화면 곳곳에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중림동 산동네가 사라지고 8년 뒤인 2005년 김기찬도 죽었다. 68살이었다. 도시연구자 김형국이 “사람이 한반도 땅에 정착해서 집단 취락을 이룬 이후 줄곧 이어져온 유구한 역사의 공간 양식”(228쪽)이라고 평한 골목길도 그 사이 서울과 대도시에선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이로써 골목길은 그리움의 대상에서 애도와 멜랑콜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골목길에 투사됐던 ‘공동체’를 향한 도시인들의 소망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으리란 점이다. 이미 김기찬의 사진 속에서 그것은 ‘부재하는 현존’이라는 역설적 방식으로 불멸의 삶을 획득하지 않았는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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