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사람을 바꾼다면, 팸플릿은 역사를 바꾼다. 긴급한 시대의 요청에 급박하게 응답하는 팸플릿 자체가 ‘역사’가 된 경우도 적잖다. 마르크스·엥겔스의 , 레닌의 는 원래 팸플릿이었다. 새 여명이 밝아오던 시대에, 루터와 루소도 팸플릿을 애용했다. 팸플릿의 생명력은 현재도 유효한데, 최근 프랑스를 시작으로 세계를 달군 스테판 헤셀의 도 팸플릿 형식이다.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가 되고 있는 ‘희망버스’는 역사에 남을 만한 팸플릿을 낳고 있다. 희망버스 승객들은 2차 희망버스를 탈 때 1차 희망버스 전후의 기록을 담은 를 받아보았다. 이번엔 글에 사진이 더해졌다. 1~3차 희망버스를 기록한 ‘팸플릿 사진집’ (Archive 펴냄)가 출간된 것이다.
“사진보다 이 책 자체가 중요”에는 작가 23명의 작품이 담겼지만, 제작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책을 만든 이들은 “한금선, 노순택 사진가를 포함한 몇이 사진집 출간을 제안하고 23명의 사진가가 사진을 제공하고 사진을 고르고 편집하고 묶어내는 데 열흘이 걸렸다”고 전한다. 그만큼 희망버스의 감동을 전하기에 마음이 다급했던 것이다. 의 사진에는 작가의 이름이 없다. 이유는 이렇다. “작업에 함께한 사진가 모두가 자신의 크레디트를 고집하고 않고, 전체 이야기 구성에 맞추어, 자신의 사진을 재배치하고 트리밍하고 하는 전 과정에 대해서 쾌히 동의했다. 누구의 사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책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공동 작업’에 참여한 작가들 이름을 한 번쯤 적어두자. 권우성, 김수진, 김홍지, 김흥구, 노순택, 류우종, 박민혁, 박승화, 양태훈, 오은진, 유성호, 이명의, 이미지, 이재원, 이정선, 이치열, 임태훈, 정기훈, 정책용, 조재무, 최형락, 한금선.
는 2011년 희망버스 기록이지만, 사진집은 우리를 20년 전으로 데려간다. 1991년 박창수, 2003년 김주익, 2011년 김진숙, 이렇게 이어지는 한진중공업 노동자 역사 속에 오늘의 희망버스가 놓이기 때문이다. 의문사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장례식, 85호 크레인 위에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위원장의 죽음을 배경으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서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희망버스 부분에는 ‘김진숙들’이 있다.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김진숙, 아득한 어둠에 묻힌 김진숙, 크레인 난간에 기대 생각에 잠긴 김진숙. 여기에 크레인 아래에서 울고 웃는 ‘김진숙들’의 모습도 있다. 크레인 중간에 있는 ‘영도의 4인’이 밧줄로 생수를 받는 표정은 얼마나 절박한지, 크레인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한진중공업 푸른 작업복을 입은 ‘스머프들’의 일상은 얼마나 애달픈지, 망막에서 사진은 지워져도 기억에선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포효하는 문정현 신부, 절규하는 박창수 열사 아버지, 비탄에 잠긴 백기완 선생의 얼굴에는 기나긴 글로도 담지 못할 절박함이 깃들어 있다. 공장 담벼락을 넘는 청바지들, 경찰 방패에 찍힌 작업복들의 모습도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경찰이 난사한 최루액의 푸른색 방울이 점점이 흩어지는 순간은 마치 디스토피아를 그린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렇다고 슬픈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은 희망버스 승객들이 “즐겁고 신나는 표정을 지녔다”고 전한다. 김진숙에게 다가가는 동안에 축제를 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무키무키 만만수’가 ‘지르는’ 노래의 쾌감을 함께 노는 이의 발길질 하나에 오롯이 담은 사진이 그렇다. 여기에 희망버스를 세 번 모두 탄 사람한테도 새삼스러운 장면이 많다. 봤지만 보지 못했던 얼굴들(예컨대 한진 해고자 이용대 아저씨가 발언하며 저렇게 절규했지), 함께 있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던 표정들(색색깔 비옷 입은 사람들의 표정이 자세히 보면 저랬구나), 타고도 몰랐던 순간들(어머, ‘소금꽃 사진관’이 있었나 보네) 등등등.
희망버스도 못 간 곳으로 이끌어
는 희망버스도 함께 가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2차 희망버스에 맞춰 천릿길을 걸은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3차 희망버스에 앞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비에 젖고 눈물에 젖은 순례를 중계한다. 경찰의 봉쇄에 막혀 소수의 사람만 참여한 한진중공업 앞 기도회로 우리를 초대한다. 는 희망버스를 탄 사람은 물론 미처 그곳에 가지 못해 밤새 인터넷 현장 중계를 보며 마음 졸인 당신, 그리고 희망버스를 ‘글’로 배운 이들에게 두루두루 유용한 책이다. 나중에 ‘노동운동 기념관’이 생긴다면 반드시 소장될 사진 팸플릿 . 인세 전액은 희망버스 등에 기부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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