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장 집무실에서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레즈비언 커플 필리스 라이언과 델 마틴 커플의 결혼식이었다. 85살을 넘긴 이들은 2008년 5월부터 동성 간 결혼이 허용된 캘리포니아주에서 결혼식을 올린 ‘동성 커플 1호’로 기록됐다. 둘의 인연은 5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만난 이 커플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려고 다른 6명의 여성들과 함께 1955년 미국의 첫 레즈비언 단체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클럽을 만들어 50년 넘게 동성애자들의 권리 찾기에 매진해왔다. ‘빌리티스의 딸들’은 이후 동성애자의 권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됐다.
여성 동성애 정면으로 다룬 1호 드라마지난 8월8일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8월7일 방영된 한국방송 덕분이다.
최근 우리나라 TV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나 관련 코드를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지난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는 남성 동성애 커플을 긴 호흡의 드라마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뤘다. ‘젠더 감성’에 부적절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지만 문화방송 이나 , SBS 등의 드라마는 동성애를 드라마 속 하나의 설정으로 사용했다. SBS 토크쇼 에는 커밍아웃한 홍석천이 출연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는 농담이나 유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채널을 케이블 채널로 돌리면 ‘웰메이드 LGBT 드라마’로 유명한 <l>나 등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가 시리즈로 방영된다.
TV가 동성애를 다루는 게 특별하게 주목할 만한 일도 아닌 세상이다. 그럼에도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에 주목한 이유는 비록 60분짜리 단막극이지만 이 드라마는 여성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1호 드라마’라는 점 때문이다. 드라마는 고등학생·30대·50대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보여준다. 각 커플에 할당된 시간은 20분 남짓. 여고생 주연(진세연)은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고민한다. 여학생들끼리의 스킨십을 벌점으로 관리하는 학교의 이반 검열을 비롯해 동성애 혐오 등을 여고생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30대 회사원 한나(한고은)는 같이 사는 여자친구 영은(오세정)이 자신과 다투고 집을 나가 실수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껴안으며 함께 아이를 키우는 부부로 거듭난다.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레즈비언 클럽을 운영하는 50대 명희(최란)와 함께 사는 향자(김혜옥). 동성애자임을 남편에게 커밍아웃한 다음 이혼당한 향자는 10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과 마주한다. 있는 그대로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향자는 딸과 처음으로 화해한다.
계몽적 내용에 웰메이드는 아니지만
제작진은 이 드라마에 대해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조금은 힘든 그들의 삶과 사랑, 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전했다. 여성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제작진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자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평론가 조민준씨는 이 드라마에 대해 “계몽 성격이 강했다”고 평했다. 드라마는 “동성애는 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이다”와 같은 대사를 통해 교과서적인 내용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제작진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조민준씨는 “동성애 역시 삶의 방식 중 하나라는 걸 보여주기보다 동성애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려 했던 점은 아쉽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여전히 편견과 싸우는 과정을 보여주는 계몽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계몽이 한참 부족한가 보다. 동성애에 대한 일부 시청자의 차별적 시선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은 ‘클럽 빌리티스의 딸들’ 방영 전부터 방송 금지를 요청하는 글로 들끓었고, 방송 이후에는 이를 비난하는 글로 북새통을 이뤘다. 방영 당시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는 내용의 신문 광고를 낸 참교육어머니전국모임·바른성문화를위한전국연합 등의 단체는 SBS 항의 방문을 강행하며 비난을 쏟아냈다. 의 경우 김수현 작가는 이 단체들의 광고에 “웃음도 안 나온다”고 잘라 말했지만, 방송사는 이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드라마 후반부에서 남자 주인공의 언약식 장면을 잘라냈다. 이에 대해 김수현 작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방송사를 향해 화가 났다”며 “차별 금지를 위해 뭔가 해야 할 방송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라고 말했다.
한국방송도 다르지 않았다. 방영 전에는 이 드라마가 여성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라는 점을 홍보하던 방송사는 ‘공영방송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비난이 거세지자 지난 8월7일 이 드라마의 홈페이지 다시보기 서비스를 중단했다. 김수현 작가의 말을 빌리면, 차별 금지를 위해 나서야 할 공영방송이 일부 시청자의 반응에 무서워 공들여 만든 방송의 생명을 알아서 끊은 꼴이다. 한국방송 쪽은 “19살 이상 시청이 가능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청소년을 고려해 다시보기 서비스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소수자 혐오에 맞서는 책임의식 가져야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는 8월11일 ‘다시보기 서비스 즉각 재개’를 주장하는 논평을 내고 “방송사 스스로 호모포비아를 되돌아보고 즉각 드라마 다시보기를 재개하길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밝혔다. 성정치위원회는 “공영방송으로서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가진 시청자 의견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방송을 통해서 답하는 것”이라며 “정치적 외압에 맞서 공정한 방송을 만들어나갈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이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도 그렇게 해야 할 당위가 있다”고 지적했다. 차별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은 공영방송사가 과연 공영방송사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되물어야 할 때다.
안인용 기자 " target="_top">nico@hani.co.k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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