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만 명.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8월3일까지 야구장을 찾은 관중이 450만 명을 넘어섰다. 경기당 평균 관중은 1만3천 명으로 지난해보다 16% 늘었다. 올해 ‘700만 관중 시대’를 열 것이라는 관측은 이번 시즌 내내 미디어에서 축포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700만 관중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기존 야구팬뿐 아니라 여성·가족 관중이라는 분석 기사도 꾸준히 나온다. 달라진 야구장의 풍경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TV 야구중계를 비롯해 수많은 매체의 카메라는 오늘도 전국 야구장을 찾은 여성·가족 관중을 포착해낸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공을 둥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font></font>
지난 2~3년 사이 야구가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국가대표팀이 선전하면서 야구 붐이 조성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특히 국가대항전을 보며 야구에 대해 알게 된 여성들이 야구팬이 됐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각 구단의 홍보 마케팅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분석도 빠지지 않고 나온다. 야구가 남자의 스포츠에서 남녀의 스포츠가 됐다는 얘기다.
축구는 어떤가. 월드컵만 치르면 전국에 붉은 물결을 만드는 축구야말로 명실상부한 ‘국민 스포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 국가대항전이 있는 날에는 축구 경기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국가대항전만 끝나면 축구 열기는 서해안 펄밭에 물 빠지듯 없어진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던 붉은 티셔츠의 응원녀들은 사라지고, K리그가 펼쳐지는 축구장은 썰렁해진다. 제아무리 미디어에서 외쳐도 축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끊임없이 새로운 팬을 만들어나가는 야구의 힘은 뭘까. 기자로서 이러저러한 팩트와 이유를 들어 그 힘을 분석해내야 마땅하겠지만, 이미 나올 만큼 나온 기사에 또 하나 추가하는 건 어쩐지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만 늘리는 꼴이다. 사실 그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조차 없다. 30년 동안 굴러가는 둥근 것, 공이라고 일컫는 그 물체에 대해 대체로 ‘미지근’했던 기자가 야구팬이 됐으니 말이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그들’ 중 한 명이 될 줄은 몰랐다. ‘700만 관중 시대’가 코앞이라는 야구 기사와 카메라가 잡아내는 장면에 등장하는 여성 관객이 ‘내’가 될 줄은 몰랐다는 얘기다.
스포츠에 관한 한 나는 대한민국 ‘평균’이었다. 중학교 때 농구 붐이 불어 모두가 드라마 의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연고전을 챙겨볼 때, 나도 봤다. 우지원을 외쳤는지 전희철을 외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딱 또래 친구들이 열광하는 만큼 열광했다. 고등학교 때 박세리가 하얀 발로 ‘필드 위의 기적’을 일궈냈을 때는 아빠 옆에서 박세리의 퍼팅을 숨죽여 지켜봤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월드컵 붐이 불었다.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앉아 축구를 봤다. 남들처럼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월드컵 경기를 봤다. 농구와 골프, 축구 모두 한철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동시 환호성’으로 인한 ‘공동 추억만들기’의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철이 끝나고 나면 ‘오프사이드가 먹는 거였던가?’ 할 만큼 무관심으로 돌아섰다.
야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찬호가 ‘가장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를 차지하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올림픽과 WBC에서 승전보를 울리던 몇 년 전까지 야구 역시 붐이 일 때면 잠깐 보고 마는 경기였다. 농구나 축구, 골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홈런 말고는 도대체 어떻게 점수가 나는지조차 알 수 없던 스포츠였다는 점 정도였달까. 던지고 치고 달리는 건 알겠지만, 무엇이 스트라이크이고 무엇이 볼이며 왜 누구는 쳤는데 아웃되고 누구는 세이프가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IMAGE3%%]<font size="3"><font color="#C21A8D">그의 취미에서 나의 취미로</font></font>어떻게 처음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야구 규칙을 아주 조금 알게 된 다음부터라고 답하겠다. 규칙을 알려준 것은 WBC도 올림픽도 아니었다. 2009년 방송된 한국방송 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아이가 걷는 법을 익히는 것처럼 하나씩 규칙을 알게 됐다. 지금은 은퇴한 야구선수 양준혁은 한 인터뷰에서 야구 붐이 조성된 이유 중에 ‘천하무적 야구단’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WBC 준우승 다음이라고 말했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야구는 그렇게 어려운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걸 일깨워준 거다”라고 덧붙였다. 양준혁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나 ‘천하무적 야구단’이 예능 프로그램으로서의 재미를 잃어가자 나 역시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고, 어느새 ‘삼자범퇴는 사자성어였나?’ 수준까지 퇴보했다.
야구와 다시 만난 건 올해 프로야구 시즌 전, 시범경기가 한창이던 지난 3월 즈음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이자 현재의 남편은 야구광이다. 그때는 그 점이 나와 무관했다. 야구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저 ‘그의 취미’였다. 내 주변의 많은 지인들 중에도 남자친구나 남편이 야구광인 이들이 꽤 있다. 그들 대부분은 “만날 야구만 본다”고 툴툴댄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범경기가 시작되자 어딜 가도 휴대전화를 들고 끊임없이 점수를 확인하는 남자친구를 “그만 좀 하라”며 타박했다.
모든 애정과 애착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어느날 무심코 “잘생긴 선수가 있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누군데?”로 응수했다. 그렇게 처음 야구선수 이름을 검색창에 돌렸다. 단지 호기심이었다. 잘생긴 선수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데 분명히 효과가 있다. 그렇게 선수를 몇 명 알고 나니 그렇게 재미없던 야구 경기가 점차 재미있어졌다. 그 팀에 애착이 생겨났다. 얼굴로 야구한다는 비난을 받는 몇몇 선수들에 대한 글을 검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야구 마니아의 커뮤니티로 이어졌고, 커뮤니티를 들락거리다 보니 버릇이 됐다. 잘생긴 야구선수에 대한 호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생긴 것보다 잘하는 게 더 멋져 보였으니까.
“남자친구로 인해 야구를 보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남자친구나 남편이 야구광인 이들 중 나처럼 야구를 접하게 된 이들이 있다. 내가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나니 주변 몇몇이 슬그머니 “나도 그렇다”고 정체를 밝혔다. 이런 경우 보통 그 남자를 따라 한 팀의 팬이 된다. 이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렇게 야구를 알게 되었으나 지금은 야구 자체가 재미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남자친구나 남편이 야구광이면, 특히 자신의 야구 지식에 대해 설명하는 걸 즐기는 성격이면 속성으로 야구 규칙 등에 대해 알게 된다. 물어보면 신나서 얘기하니까. 나 역시 숱하게 물었다. 야구 경기를 보다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마다 옆에 있는 ‘야구 지식인’에게 물었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갈아탈 수 없는 팬심이 생기다 </font></font>야구 커뮤니티마다 종종 올라오는 글이 있다. “어떻게 하면 여자친구가 야구를 좋아하게 될까요?” 답은 항상 비슷하다. “야구장에 데려가세요.” 정답이다. 시즌이 시작되고 4월 초에 처음으로 야구장에 갔다. KTX를 타고 대전구장으로 원정 관람에 나섰다. 갈 때의 기분은 ‘가자고 하니 (귀찮지만) 가겠다’였는데, 올 때의 기분은 ‘이거 재밌네’였다. 한참을 줄 서 표를 사들고 3루 외야석에 앉았다. 모두가 치킨을 먹고 있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풀메이크업에 한껏 차려입고 나온 언니들도 있었고,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맥주를 손에 든 언니들도 있었다. 야구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며 응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저절로 흥이 났다. 길게만 느껴졌던 야구 경기도 막상 가서 보니 순식간이었다. 매회 던지고 치고 달리는 선수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야구와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그렇게 야구는 일상으로 ‘침투’했다. 그 전에는 “겨울이 되면 야구를 보지 못해 우울하기까지 하다” “야구 시즌이 시작되면 저녁엔 아무것도 못한다”는 야구광들의 증언을 들을 때마다 ‘에이, 설마’ 했는데 그게 점점 내 얘기가 됐다. 4월부터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야구를 봤다. ‘본방사수’에 실패하면 케이블TV 야구 프로그램이나 하이라이트라도 챙겨봤다. 기사 마감을 하면서도 야구 중계창을 띄워놓았고, 저녁 약속 자리에서도 틈틈이 휴대전화로 점수를 확인했다.
5월까지는 매일 즐거웠다. 많이 이겼으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팀의 팬이 됐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지역 연고 등과 전혀 상관없이 단지 그저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팀이라서 자연스럽게 팬이 된 것뿐인데도 그 팀이 이기면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6월이 됐다. 점점 지는 경기가 많아지고 그토록 완벽해 보이던 선수들이 무너지는 걸 보며 한 팀의 팬이 됐다는 게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패배로 인한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컸다. 처음엔 선수들을 욕하는 남자친구를 보며 “왜 그렇게 욕을 해”라고 핀잔을 줬던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비난의 멘트가 나왔다. 스포츠팀의 팬이 된다는 것은 연예인의 팬이 된다는 것과는 판이했다. 연예인은 차고 넘쳐 갈아타는 게 어렵지 않지만 야구팀은 고작 8개뿐이다. 게다가 야구는 경기를 할 때마다 상대가 늘 적이다. 내 팀이 못한다고 어찌 그리 쉽게 적의 편으로 돌아서겠는가.
6월의 어느 날,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남자에게 물었다. 질문의 요지는 이제 야구를 고작 3개월 봤을 뿐인데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떻게 당신은 그걸 30년을 보았단 말이냐, 였다. 설명은 단순했다. 계속 보다 보면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했다. 그러고는 팀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순간에 대해 마치 첫사랑 얘기를 하듯 읊조렸다. “그때 얼마나 잘했느냐면….”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회고는 연패를 끊지 못하는 현재에 대한 푸념으로 이어졌다. 포기하는 법은 30년이 지나도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문득 생각했다. ‘이 팀이 계속 못하면 나 역시 저렇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어서 빨리 야구를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항상 잘하는 팀으로 옮기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무수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오늘도 역시 그 팀의 기사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팀의 경기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끝없이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체념하고 환호하고 분노하고 안쓰러워하면서 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야구인지도 모르겠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야구는 곧 인생이란 비유마저 이해해 </font></font>월요일과 비 오는 날, 추운 겨울을 빼고 매일 야구를 한다. 선수들은 매일 직장에 출퇴근하듯 야구장에 나온다. 그날의 승패와 상관없이 오늘도 내일도 야구장에 나온다. 팀의 선수 전원의 이름을 알게 되고, 상대 팀 선수들도 알게 되고, 그들의 지나온 날들과 그 결과인 기록을 알게 되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면 야구는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되는 일일드라마나 다름없다. 어제의 이야기는 오늘로 이어진다. 선수 11명 중 누구는 그날의 주인공이 되고 누구는 악역을 맡는다. 누군가는 부상을 당해 빠지고 다른 이가 그 자리에 대신 나온다. 일일드라마치곤 장르도 다양하다. 하루는 인간 승리의 휴먼드라마고, 다른 날에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멜로이고, 그 다음날은 기막힌 설정의 막장 드라마이고, 또 그 다음날은 살 떨리게 하는 납량특집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야구광을 만나면 가장 좋아하는 선수와 기억에 남는 순간, 그리고 야구를 보는 이유를 묻는다. 대답은 다 다르다. 신기한 건 대부분 그 대답이 그 사람과 참 닮았다. 또 야구에 대해 물었는데 자기가 살아온 삶의 어느 순간에 대해 얘기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일 때도 있고, 행복했거나 불행했던 기억일 때도 있다. 보통 야구를 인생에 비유한다. 그런 비유법이 전에는 한없이 유치하게 들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살고 싶은 인생을 야구에서 보는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삶 속에서 매일 자기만의 야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 LG트윈스가 SK와이번스에 패해 5위로 내려앉았다. 아, 인생이고 뭐고 이 드라마는 어떻게 해피엔딩 안 되겠니?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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