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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꼬집자 한국방송에서 ‘방송 부적격’, 인디음악에만 엄격한 여성가족부의 이중 잣대… 정치적 검열 그림자 어른거려
등록 2011-07-22 18:25 수정 2020-05-03 04:26
옴니버스 음반 <대한민국을 노래한다> 속지와 재킷 사진. 음반 수록곡 중에 4곡이 한국방송 심의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옴니버스 음반 <대한민국을 노래한다> 속지와 재킷 사진. 음반 수록곡 중에 4곡이 한국방송 심의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는 원래 결혼식 축가였다. 1977년 공장에 취업한 김민기가 돈이 없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자리에서 앞날을 축복하고자 만들고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양희은의 음반으로 발매되자마자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유신정권이 어떤 사유를 붙였는지조차 불분명하다.

1987년 금지곡에서 풀린 는 1998년 정부 수립 50돌을 기념하고 외환위기 극복을 독려하려 만든 텔레비전 공익광고에 쓰였다. 골프 영웅 박세리가 ‘맨발의 투혼’을 발휘한 장면과 함께 온 국민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2002년 정부 공식 행사인 3·1절 기념식 축가로 불렸는가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 광고에도 쓰였다. 노래는 그대로인데 시대 상황에 따라 결혼식 축가에서 금지곡 딱지가 붙은 저항가요로, 또 국난 극복을 독려하는 국민가요로, 이제는 모두가 즐겨 부르는 국민 애창곡으로 위상이 변해온 것이다.

4대강 홍보는 되고 비판은 안 되고
음반 <대한민국을 노래한다>

음반 <대한민국을 노래한다>

이는 과거 금지곡의 잣대가 얼마나 작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신중현의 , 송창식의 , 한대수의 , 이장희의 등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념비적인 곡들조차 왜색풍, 비판조, 외설적, 불신 풍조 조장, 허무주의 등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주홍글씨’ 낙인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1996년 가요 사전심의제도가 철폐돼, 어이없는 ‘주홍글씨’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대중가수들이 사회 비판 메시지를 노래한 음반이 유독 한국방송 심의에서만 무더기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인터넷 다음 카페 ‘문화예술로 알리는 시민의 소리’(cafe.daum.net/culture.people)는 지난 6월21일 옴니버스 음반 를 발매했다. 4대강·반값등록금·비정규직·부동산·언론·교육 등 다양한 사회 현안을 이정열, 한동준, 블랙신드롬 등 대중가수들이 노래했다. 제작자 엄현우씨는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U2 등 서구의 많은 음악인들이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비판하는 노래를 불러온 것처럼 우리도 음악으로 사회참여를 해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엄씨는 지난 7월7일 수록곡 10곡 중 4곡이 한국방송 심의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통보받았다. 용산 참사를 노래한 , 4대강 문제를 비판한 , 사회 전반을 풍자한 , 보수 신문의 왜곡 보도 행태를 꼬집은 등은 한국방송 텔레비전·라디오 전파를 탈 수 없게 됐다. 한국방송 심의실은 “전반적 분위기가 지나치게 염세적이고 어두운 노랫말로 사회 갈등 및 불안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현실 부정적인 노랫말”(), “사회현상을 풍자하고는 있으나 부정적 사회 가치관을 조장한다”(), “현실에 대한 냉소가 지나치고 사회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반면 문화방송, SBS, 기독교방송, 불교방송, 평화방송 등 다른 방송사에서는 모두 방송 적격 판정을 받았다. SBS 심의팀 관계자는 “음악을 통한 사회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니냐”며 “관건은 표현 자체인데, 방송에 부적합한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보통 방송 부적격 판정은 욕설, 선정적 표현, 특정 집단 비하 등에 주로 내려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엄현우씨는 “방송에 4대강 사업 홍보 영상은 나오는데, 반대 목소리는 왜 나올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는 “부적격 사유라고 든 걸 보면 ‘불신 풍조 조장’처럼 유신시대에나 보던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라며 “공영방송 한국방송이 요즘 얼마나 퇴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심의 결과”라고 말했다. 정치적 검열의 음습한 그림자마저 느껴진다는 얘기다.

술, 아이돌은 되고 인디는 안 되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가요 심의는 또 있다.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내리는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이 그렇다. 인디밴드 ‘감성밴드 여우비’의 정근영은 자신의 노래 가 ‘19금’ 판정을 받은 데 대해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다. “가끔 술 한잔에 그대 모습 비춰볼게요”라는 노랫말을 문제 삼아 여성가족부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한 것이다. 보드카레인의 , 10센치의 , 박준혁의 등도 비슷한 이유로 ‘19금’ 딱지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청소년에게 판매할 수 없는 건 물론, 심야 시간이 아니면 방송 전파도 탈 수 없다.

정근영은 “청소년들에게 술 생각나게 한다고 ‘19금’이 됐다는데, 그러면 등 술에 관련된 수백 곡의 노래들이 모두 청소년유해매체물이냐”며 의구심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술·담배·마약 등 유해 약물을 미화하거나 조장하는 내용이 있으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한다”며 “2006년 11월부터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가요 심의를 진행하고 있어 이전의 경우와 괴리가 있을 수는 있다”고 밝혔다. 2006년 이전 발표곡은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2006년 이후만 따져도 일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아이돌 그룹 2PM이 발표한 신곡 에는 “술 한잔을 다 같이 들이킬게”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이 음반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방송 출연도 문제 없다. 이 때문에 ‘19금’ 판정을 내렸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딪힐 걸 우려해 대형 기획사의 인기 아이돌에는 느슨하고, 힘없는 인디 음악인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란 기본조차 잊은”

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씨는 “예술의 기본은 자유로운 표현인데, 이런 기본 인식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생각과 한참 동떨어진 그들만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 자체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라며 “여성가족부의 황당한 심의에 대해선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한겨레 문화부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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