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학생이던 나는 교내 동아리가 모여 있는 건물에서 인상 깊은 걸개를 봤다. 두 개 층에 걸쳐 걸린 커다란 걸개는 오색찬란한 무지개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쓰여 있던 문구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날자’ ‘자유’ 등의 맥락이었던 것 같다. 걸개는 교내 동성애자 모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무지갯빛이 참 아름답구나, 세상은 저렇게 다채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아름다운 것이지’라고 생각했다면 거짓말이고, 편협하던 나는 그저 생경한 문화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외국 여행에서 만난 다정한 동성애 커플이라든지, 메가 히트를 기록한 미국 드라마 같은 외국 문화와, 국내 매체들이 차츰차츰 조명하기 시작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들을 접하며 더 이상 생경한 세계라 생각지 않게 되었다. 보기에, 그저 똑같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는 매일을 살아내는 일상인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흘러 10년이 지났고, 동성애에 무지하던 어느 개인의 무감함이 한 뼘 정도 줄어들었으니 세상도 그와 비슷한 정도로, 아니면 둔감한 나보다 더 많이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착각이었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고단한 몸을 찌릿거리게 한, “동성애자는 정신병 아니냐”는 내 옆자리 여성들의 대화는 여전히 성소수자를 세상의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이중적 약자가 되거나 편견에 휩싸이거나</font></font>
하지만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다만 다수가 곧 정상이라 여기는 사회가 이들을 광포하게 혐오하며 ‘아우팅’(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정체성을 공표하는 일)시켰을 뿐이다. 사회의 다수가 폭력적으로 열외시키려 해도,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법이다. 최근 국내 첫 게이 다큐 이 개봉했고, 책으로는 (시대의 창 펴냄)가 출간됐다.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가 주도하고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씨가 취재에 나선 은 ‘두려움에서 걸어나온 동성애자 이야기’다. 경계의 선을 넘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과정, 함께 공기를 나눠 마시고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려는 힘겨운 맞섬과 견딤의 과정이 담겼다. 각 장은 미디어, 종교, 군대, 청소년,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가족, 동성애운동을 다룬 7개 주제로 나뉘어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혐오 등을 들춰낸다.
커밍아웃한 유명인들을 내세우거나, 잘생기고 멋지게만 동성애를 그려 일부 왜곡된 시선을 드러내는 대중매체와 달리 책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인터뷰이로 내세운다. 더불어 주목할 점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거론되어온 청소년의 동성애 문제에도 귀기울였다는 것이다. 4장 ‘동성애가 성장통이라고요?’에서는 청소년과 동성애자라는 이중적 약자로 살아가는 고등학생 윤준석씨와 2010년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반년간 동인련 ‘청소년 자긍심팀’ 팀장을 맡아 활동하다 현재 군 복무 중인 김우주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청소년이란 게 가족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소수자와 소수자가 만나다 보니까 더 심해지더라고요. 이중 억압을 당하죠. 심각할 정도로요. …한번은 집에서 막 나가려는데 (부모님이) ‘어떤 놈이랑 그런 짓 하러 가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화내야 되는데 웃었던 기억이 나요.”(윤준석)
어린 몸과 여린 마음을 가진 청소년 동성애자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무도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제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딱 하나인데, ‘도와줄까?’였어요. ‘도와줄게’도 아니에요. 저희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만 하면 되는데 정말 그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김우주)
책은 동성애와 관련한 견고한 편견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한다.‘동성애=에이즈’라는 오해는 동성애자를 옥죈다. 5장 ‘에이즈, 이해와 오해 사이’의 인터뷰이로 나선 윤가브리엘씨는 에이즈 양성 통보를 받았다. 그는 1980년대, 10대 때 자신의 성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동성애’라는 단어조차 어색하던 시절이었다. 혼란 속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겨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 시작했을 때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이즈는 그동안 자신의 삶과 게이로서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2003년 뜻있는 활동가들을 만나 HIV/에이즈 인권연대 ‘나누리+’를 조직해 지금까지 HIV 감염인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에이즈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만성질환에 불과하다. HIV 감염은 예방할 수 있고, 감염됐더라도 관리만 잘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그러나 HIV 감염인들은 자의와 상관없이 정부에 의해 ‘특별 관리’되며 발병 전 자신이 꾸려왔던 인간관계에서 ‘제명’당한다. 윤씨는 말한다. “익명으로 검진해서 양성이 나올 경우 본인이 원하면 익명으로 관리받을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익명으로 관리받으면 진료비를 지원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진료비 때문에라도 실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인권침해적인 법 조항을 개정하려고 활동할 때 언론도, 정부도 늘 그렇게 말했죠.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그래서 운동하면서 한계도 많이 느끼고, 많이 힘들었어요.”
<font size="3"><font color="#006699">소수자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font></font>동인련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꿈꾼다. 그러려면 이성애자도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서 싸우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 누구나 소수자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다수자’이기만 한 개인은 없다. 국내 첫 게이 다큐 을 찍은 이혁상 감독의 말을 곱씹어보자.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가 살고 있지만 없는 사람 취급하죠. 이른바 ‘정상성’에 속하는 사람은 이성애자 남성밖에는 없잖아요. 그 ‘정상성’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태도들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소수자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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