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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잊혀진 존재들

1960~70년대 민중사에서 지배 담론에 의해 왜곡되거나 소외된 개인들의 이야기… 김원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등록 2011-06-24 16:25 수정 2020-05-03 04:26

나는 2000년대 학번이다. 그러니까 1979년에 사망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는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린 시절 기껏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TV 앞을 오며 가며 스쳐 보았던 드라마 에서 박정희로 분한 배우의 얼굴 정도였다. 두 번째 기억은 한참이 지난 다음 실제 박정희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며 그 배우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 정도. 그리고 내가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1980~90년대에 정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박정희는 한국 정치권에서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환기됐다.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전직 대통령의 잔상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어린 나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잔상은 알게 모르게 그와 상관없다 생각해온 내 삶에도 직간접적으로 간섭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2011년이 되어서도 박정희의 그림자는 한국 정치권에 남아 떠돌고 있다. 아니,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구술로 망각된 역사를 훑다

(현실문화 펴냄)을 쓴 김원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전히 현재에 머물고 있는 박정희의 그림자가 아니라 ‘박정희 시대’에 배제됐던 ‘유령적 존재들’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의 지배 담론은 물론 저항 담론인 민중사에서도 지워졌던 이들 존재를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박정희 시대와 단절이 가능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탄가루와 화약 연기로 가득 찬 막장. 박정희 시대 탄광촌 노동자는 ‘산업역군’으로 포장돼 공포를 무릅쓰고 갱 안에 들어가야 했다. 이들은 진폐증 등 공포의 흔적을 여전히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망각된 존재가 되었다. / 한겨레21 이종찬

탄가루와 화약 연기로 가득 찬 막장. 박정희 시대 탄광촌 노동자는 ‘산업역군’으로 포장돼 공포를 무릅쓰고 갱 안에 들어가야 했다. 이들은 진폐증 등 공포의 흔적을 여전히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망각된 존재가 되었다. / 한겨레21 이종찬

김 교수는 배제된 시민계층을 그람시가 개념화하고 스피박이 그 의미를 발전시킨 ‘서발턴’(subaltern)이란 용어로 지칭한다. 그는 서발턴을 “근대 보편주체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공장 노동자로 대표되는 고정적이고 단일하게 통합된 주체가 아닌 비서구 사회의 종속 집단을 지칭하는 ‘상황적인 개념’” “엄격한 계급 분석이나 계급으로 환원(혹은 특권화)되지 않는 집단의 사회적 정체성과 이를 둘러싼 투쟁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에게 서발턴이란 “시기마다 이질적일 수 있는 가변적 인식의 대상”이다.

그래서 김 교수가 지칭하는 1960~70년대의 서발턴은 도시 빈민, 폭도 소년원생, 범죄자, 기지촌 여성, 간첩 지식인, 파독 간호사, 광산 노동자, 파월 병사 등을 포함한다. 김 교수는 이들을 박정희 시대의 ‘유령’이라 은유한다. 민중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으며 연구자의 시야에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다.

책은 크게 4부로 이뤄져 있다. 먼저 1부에서는 경제발전을 최우선적 가치로 설정하는 뉴라이트 진영 역사관의 내적 한계와 모순을 다룬다. 더불어 1980년대 민중사에서 배제되고 ‘더러운 것’으로 치부된 도시 하층민 등 박정희 시대 서발턴의 역사를 살핀다. 2부에서는 앞서 말했듯, 파독 간호사와 탄광촌 노동자에 집중한다. 기록 없는 주체들의 구술과 증언을 통해 망각된 역사를 불러들인다. 3부에서는 박정희 시기 광주대단지 사건(1971년), 무등산 타잔 사건(1977년), 소년원 탈출 사건과 부마항쟁(1979년)을 통해 범죄·봉기·탈출이란 행위로 서발턴이 자신을 드러냈던 사례를 소개한다. 마지막 4부는 정치라는 주제로 1~3부를 정리한다.

김원 교수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김원 교수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김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을 현재에 불러내는 방법으로 ‘구술’을 채택했다. 그는 그들의 일관되지 않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전형화하지 않고 스스로 그들의 생애 속에 들어가보려 애썼다. ‘빙의’를 통해 소외된 이들의 생애사를 재현하고, 당시의 기사·칼럼 등 2차 자료를 통해 명료하지 않은 목소리들을 보완했다.

김 교수는 유령 집단에서 특히 파독 간호사와 탄광촌 노동자의 기억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이들은 당시, ‘자유를 수호하러 가는 애국자’ ‘경제성장의 숨은 주역’ ‘외화벌이 애국자’ ‘근대화를 이룩한 산업역군’ 등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번드르르한 포장 이면에 실제 겪었던 고단함과 고통은 외면됐다. 개인 행위의 진의는 왜곡되고 무시당했으며 지배체계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됐다.

지배적 기록은 박정희 시기 파독 이주여성이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독일에 갔다’ ‘가부장의 보호로부터 탈출해 문란하고 사치를 일삼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박정희 정권이 끝난 뒤 제기됐던 경제성장과 근대화란 주제와 연결돼 ‘만들어진’ 해석이었다. 김 교수가 만난 박한뫔, 신길순한테 파독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두 이주여성은 외화벌이 애국자가 되려고 독일에 건너간 것이 아니었다. 삶의 또다른 기회로 삼거나, 실업 증가와 같은 사회 모순 등의 다양한 이유로 독일행을 택한 것이었다.

탄광촌 노동자는 조국 근대화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막장에 들어갔다. 1980년대 탄광에서 벗어난 뒤에도 진폐증이란 몸의 흔적을 통해 그들은 공포를 또 다른 방식으로 현재화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는 구국자원을 생산하는 ‘산업전사’로 인정받는다 생각했지만, 한국 사회는 이들을 집단적으로 망각했다. 탄광촌 노동자는 잊혀진 존재로서 자신을, 시대에 이용당한 베트남전 참전 군인, 미군에 죽임을 당한 ‘미선이·효순이’와 같은 선상에 놓는다.

기존 역사서사의 한계 드러내는 일

2006년 를 출간하기도 한 김 교수는 남성중심주의 노동 담론에서 소외됐던 여성 노동자를 중심에 끌어들였다. 상식화된 노동 담론 패러다임을 전복했다. 이번 저작을 통해서는 지배 담론에서 추방돼 떠돌고 있는 유령들을 현재로 불러들였다. 김 교수는 그들의 고통을 드러내고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 민중사와 노동사, 뉴라이트 역사서사의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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