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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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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에 따르라!

등록 2001-07-18 00:00 수정 2020-05-02 04:21

자연의 이법을 실천의 표준으로 삼아… 세상과 인간에 두루 이로운 절대의 가치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述而不作. <論語·述而>) 공자는 이 말 한마디로 자신이 무엇을 새롭게 창안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 유산의 전달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옛것을 잘 쌓아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爲政>)고 했다. 공자가 보기에 무엇을 함부로 지어내어 말하는 것은 꺼려야 할 일이었으며, 새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옛것을 잘 쌓아 갈무리해야 했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후대에 긍정·부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끼쳤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실제 일어난 일, 검증된 일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태도를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공자는 “괴이한 일, 힘쓰는 일, 어지럽히는 일, 귀신에 관한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子不語: 怪, 力, 亂, 神. <術而>)고 <논어>는 전한다. 이는 공자의 합리적인 면모다. 그는 제자가 “황제(黃帝)에게는 눈이 네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어찌 사람이 실제로 눈이 네개 있었겠느냐. 네명의 재상을 두어 천하를 잘 살피도록 했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공자는 황제의 설화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유가의 합리주의적인 면모는 이런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거나, “옛것을 잘 쌓아 새것을 안다”는 말은 옛것을 숭상하는 상고주의를 강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상고주의는 새것을 지어내는 걸 반대, 억압하고 옛것만을 높이라고 강요하는 논리로 쓰일 때 일쑤 복고주의로 변한다. 이는 공자의 부정적 영향이다.

과거에 얽매여 전통에 갇힐 것인가

옛것에 조회해 오늘의 표준으로 삼는 태도는 인류의 고대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태도다. 중국의 제자백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도 옛 문화전통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못했다. 옛것을 표준삼아 오늘을 재단하는 태도에 갑갑증을 느낀 건 법가 이후의 일이다.

묵자 또한 옛 ‘성왕’의 일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공자가 자기 주장의 합리화를 위해 주공(周公) 등 옛 성왕을 동원한 것처럼, 그 또한 자기 주장의 합리화를 위해 우(禹) 임금 같은 ‘성왕’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서술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는 공자의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의 좋은 것은 서술하고, 오늘의 좋은 것은 창작하니, 좋은 것이 더욱 많아지길 바라기 때문이다.”(古之善者則述之, 今之善者則作之, 欲善之益多也. <耕柱>) 옛것이라 해서 무조건 따르지도 않지만 무조건 배척하지도 않는다. 좋은 점이 있다면 오늘날 다시 살려내어 응용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옛일은 접어둔다. 또 필요하다면 옛일에서 전거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오늘날에 맞도록 창안해낸다. 묵자의 이 말은 오늘날 보더라도 전통과 현대에 대한 매우 합리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옛날의 좋은 것을 서술”하는 데 방점을 찍는 사람이라면 보수주의자일 터이고, “오늘의 좋은 것을 창작”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면 진보주의자일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친일파, 매국노, 독재자, 군사정권, 족벌언론 따위와 같은, 진작 역사의 쓰레기처리장에 내다버려야 마땅한 것들을 어루만지며 스스로가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주의자에게는 표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없다. 과거 자체가 표준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논리를 창안할 때는 표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먼저 판단기준에 대해 동의를 얻지 못하면 새롭게 창안한 논리는 아무런 권위도 정당성도 확보하기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다.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백성들이 처음 생겨나 아직 지도자가 없던 옛날로 되돌아갔다고 하자. 그러면 천하의 사람들은 저마다 올바름에 대한 판단기준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있으면 한 가지 뜻이 있고,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 뜻이,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뜻이 있을 것이다.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뜻’이라는 것 또한 수없이 불어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은 옳고 다른 사람의 뜻은 그르다고 하여 서로 헐뜯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尙同> 中)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표준이 없다면,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준으로 삼아 제각기 다툴 것이다. 묵자가 보기에 지배적인 표준이 없다면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얼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 묵자는 아버지도 스승도 임금도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천하에 아비된 자는 많지만 어진 사람은 드물다. 천하에 스승된 자 또한 많지만 제대로 된 스승은 드물다. 천하의 임금들 또한 어진 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아비든 스승이든 임금이든 ‘사람’을 표준으로 삼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얼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늘을 법도로 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늘의 운행은 넓디넓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고, 그 베푸는 은택은 두터우면서도 그걸 덕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그 밝음은 오래가면서도 쇠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왕은 이를 법도로 삼았다.”(莫若法天. 天之行廣而無私, 其施厚而不德, 其明久而不衰, 故聖王法之. <法義>)

하늘이 베푸는 사랑은 두께가 없다

하늘을 법도,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대로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할 것을 바라지, 결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며 서로 해칠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묵자는 하늘의 뜻을 빌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로움을 나누라”(兼相愛, 交相利.)는 자신의 최고 정치 강령을 정당화한다. “어떻게 하늘이 그걸 바란다는 걸 아는가. 하늘은 모든 것을 두루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울러 이롭게 한다. 이를 보면 하늘의 뜻이 박애평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늘이 모든 것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울러 이롭게 함을 알 수 있는가. 하늘이 모든 것을 두루 아울러 온전하게 하고 모든 것을 두루 아울러 먹여살리는 걸 보아 알 수 있다.”(<法義>)

묵자의 하늘이 베푸는 사랑은 두께가 없다. 두께가 없다는 말은 어느 누구를 특별히 아끼거나 사랑함이 없다는 뜻이다. 묵자의 제자들은 이를 논리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엷지만, 하늘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성인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 두텁다. 큰 사람이 소인배들을 사랑하는 것은 소인배들이 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엷지만, 큰 사람이 소인배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소인배들이 큰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 두텁다.”(天之愛人也, 薄於聖人之愛人也; 其利人也, 厚於聖人之利人也. 大人之愛小人也, 薄於小人之愛大人也; 其利小人也, 厚於小人之利大人也. <大取>)

예를 들자면, 자기 자식에 대한 어미의 사랑은 하늘보다 더 두텁다. 하늘은 어느 집 자식 하나만 특별히 두텁게 아끼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운행은 어떤 자식에게나 고루 비를 내리고 햇볕을 비춤으로써 박애평등의 전범을 보인다. 묵자가 추구한 것은 인간의 작은 사랑이 아니라 우주적인 큰 사랑이다. 묵자가 보기에 모름지기 어떤 주장을 펴려면 우주적 차원에서 공명정대한 논리를 펴야 한다. 부분적이고 단편적인 주장으로는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묵자는 말한다. “세속의 군자들은 모두 작은 것만 알고 큰 것을 알지 못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개나 돼지 한 마리를 훔친 걸 두고 ‘어질지 못하다’고 비난하면서, 한 나라나 도읍을 훔치는 행위는 ‘의로운 거사’라고 높인다면, 이는 비유하자면 작은 흰 점을 보고는 ‘희다’고 하면서 아주 거대한 흰 판을 보고는 ‘검다’고 하는 것과 같다.”(世俗之君子, 皆知小物而不知大物. 今有人於此, 竊一犬一체, 則謂之不仁, 竊一國一都, 則以爲義. 譬喩小視白謂之白, 大視白則謂之黑. <魯問>)

삼라만상을 같은 거리에

이제 묵자의 표준에 대해 정리해보자. 묵자는 과거를 표준으로 삼길 거부하고, 과거든 현재든 세상과 인간에 이로운 것이 더 많아지도록 하는 걸 표준으로 삼길 원했다. 그의 표준은 어떤 상황이나 국면에 국한되기 마련인 ‘인간’을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주 삼라만상에 똑같은 힘과 사랑으로 작용하는 하늘을 표준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묵자의 사상은 아마도 고대 중국의 논리 가운데 고대 그리스인의 논리에 가장 접근한 논리일 것이다. 그럼에도 묵자의 표준은 그리스 철인들과 달리 우주를 넘어서 있지 않고 우주 안에 있다. 묵자의 논리가 아무리 고대 중국의 전통에서 이질적인 부분이라 해도, 그의 사유는 플라톤보다 공자와 노자에 더 가깝다. 다만 후대에 묵자가 2천년 동안 철저히 인멸당했다는 사실은, 주류에 속하는 중국의 사유가 ‘사유하지 않은’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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