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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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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옷은 전쟁터

직업에 권위를 부여하고 사람을 구별짓는 드레스 코드…신라호텔 ‘한복 제지’에는 서구에 대한 열등감 반영돼
등록 2011-04-29 17:24 수정 2020-05-03 04:26

강의실 문이 열리고 삭발한 남자가 들어왔다. 잡담하던 1·2학년 대학생들은 흘낏 쳐다보다 수다를 이어간다. 청바지 차림의 중년 남자는 강단에 서서 헛기침을 한다. 잡담은 그치지 않는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삭발한 남자가 옆구리에서 강의 노트를 펼친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입에서 “강의 시작합니다”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잡담이 그쳤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홍성민(48) 부교수의 강의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홍 부교수는 지난 4월21일 과의 전화 통화에서 “청바지를 입고 들어오면 1·2학년 학생들은 잡상인이 들어온 줄 안다. ‘넥타이도 안 매고 머리를 빡빡 밀어서 교수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의사들이 나비넥타이를 매는 이유는

옷은 사람을 감싼다. 체온을 유지하고 바람을 막는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을 구별짓는다. 삭발 머리와 청바지 차림의 홍 교수를 보고 어린 대학생들이 ‘교수답지 않다’고 판단한 것처럼,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도덕책의 가르침보다 ‘옷이 날개’라는 속담에 종종 기댄다. 옷입기와 관련된 유·무형의 규칙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드레스코드’(Dress Code)는 보통 ‘복장규정’으로 번역된다. 실제로 영어단어 ‘코드’는 ‘법규’의 의미도 가졌다. 어린 대학생들은 ‘교수는 넥타이에 양복을 입어야 하며, 이런 드레스코드를 따르지 않는 자는 교수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형법처럼, 드레스코드는 이를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를 한순간에 구별짓는다.

직종마다 복장규정에 차이가 있다. 여러 사회학자들은 옷에 실용적 기능 말고도 옷 입는 사람의 가치나 계층 등을 드러내는 기호 기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직종마다 복장규정에 차이가 있다. 여러 사회학자들은 옷에 실용적 기능 말고도 옷 입는 사람의 가치나 계층 등을 드러내는 기호 기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법률은 국회에서 제정된다. 유·무형의 암묵적 규칙인 드레스코드는 누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드는 것일까. 금융계·법조계·의료계 등 다양한 직종별 복장규정을 종합하면, ‘기능의 드레스코드’가 먼저 눈에 띈다. 직업의 특성과 기능이 옷입기에 저절로 영향을 끼친 경우다.

최근 병원에서 유행하는 나비넥타이(보타이)가 이에 해당한다. 남성 의사들은 전통적으로 흰 가운, 흰 와이셔츠, 어두운 계통의 긴 넥타이를 고집해왔다. 환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함이다. 검정은 강하고 근엄한 느낌을 주며, 짙은 회색은 진지한 성격을 강조한다. 남자 전공의 복장을 검정색 계통의 정장 바지와 흰 와이셔츠로 통일한 서울 시내 대학병원 정형외과도 있다.

최근 의사들의 긴 넥타이가 짧은 나비 넥타이로 바뀌고 있다. 환자를 진료·진찰하며 허리를 굽힐 때 긴 넥타이가 환자에 닿아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특히 중병의 환자가 누워 있는 경우가 많은 외과와 신경외과에서 나비넥타이가 선호된다. 반면에 신경정신과 등 직접 신체를 다루는 일이 적은 분야은 나비넥타이 선호도가 떨어진다. 서울의 한 안과전문의는 “정부의 의료기관 평가에서 의사의 손씻기 등 감염 억제 노력이 중요한 기준으로 포함된 지난해부터 특히 나비넥타이가 인기”라며 “병원이 나서서 의사들에게 나비넥타이를 권장한다”고 말했다.

수술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성형외과, 흉부외과 의사들은 드레스코드를 따지기 어렵다. 푸른색 수술복이 평상복이다. 서울대 병원의 한 의사는 “환자를 직접 대하지 않는 과의 경우 넥타이를 하지 않는 일이 흔하다”며 “환자가 신뢰를 가질 만한 복장이면 된다는 게 묵계”라고 말했다. 늘 수면 부족인 전공의(레지던트)들은 쉽게 부착할 수 있는 간이 넥타이를 선호한다.

항상성을 상징하는 법원의 검정색

‘권위’와 ‘신뢰도’는 법조인 드레스코드의 두 가지 핵심 가치다. ‘바람직한 재판 운영 방안’ 재판예규는 법관의 와이셔츠 색과 구두까지 세세하게 규정했다. ‘정당한 재판은 재정자 각자의 긴장과 올바른 예의에서 나오고 숙연한 마음은 복장에도 반영되는 것이므로 법정에서는 재정자 각자가 법정의 엄숙과 품위를 훼손하지 아니할 정도의 의복을 착용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예규는 또 ‘(법관이) 와이셔츠를 입어야 할 경우에는 흰색이 적합할 것이다. 법관 등이 법정에서 구두를 신어야 함은 당연하다’고 규정했다. 변호사들이 ‘튀는’ 옷을 입는 것도 금했다. ‘소송대리인 등 관계자의 복장이 법정의 품위를 해할 정도라고 판단되면 적절히 주의를 촉구함이 좋을 것’이라고 예규는 규정했다. 이 예규는 폐지됐지만 각각의 복장규정은 법원 실무제요 등에 여전히 남아 있다. 재판예규는 방청인에 대해 ‘법정 안에서는 자세와 복장을 단정히 한다’고 정해놨다. 2007년 1월까지는 판사가 입장할 때 방청인은 모자를 벗어야 했다.

이런 가치는 색깔에도 반영된다. 법복은 검정색과 어두운 자주색으로 만들어진다. 대법원은 “법복의 주색을 검정색으로 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영향에도 동요하지 않는 법집행에서의 항상성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법정용 넥타이도 ‘진지함’을 나타내는 회색이다. ‘신뢰할 만한 판사가 내린 판결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가치가 숨어 있는 셈이다. 30대 중반의 한 변호사는 “2000년대 초반 여름 재킷 안에 긴팔이 아닌 반팔 와이셔츠를 입었다고 변호사에게 핀잔을 줘 악명이 높았던 부장판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금융계도 이런 보수적인 옷입기를 하는 영역에 속한다. 남의 돈을 다루는 업무에서 고객의 신뢰는 중요하다. 하나은행 복장규정에서도 신뢰가 강조된다. ‘슈트(양복)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기본법칙을 지켜’ 입어야 한다. ‘흰색 드레스셔츠가 가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를 만든다’고 권고된다. ‘벨트와 구두는 같은색으로 통일하며 항상 깔끔하게 관리’한다. 여성도 ‘정장 재킷을 꼭 입어야’ 하며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블라우스를’ 입는다. 남녀 사원 모두 ‘헤어 관리의 포인트는 단정함과 청결함’이다. 입냄새 관리, 코털 정리도 권장 사항이다.

국회에서도 양복이 ‘옷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강기갑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국회에서 각각 면바지와 두루마기를 입었다가 비난받은 적이 있다.

국회에서도 양복이 ‘옷의 기준’으로 여겨진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강기갑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국회에서 각각 면바지와 두루마기를 입었다가 비난받은 적이 있다.

강기갑의 두루마기, 유시민의 면바지

일반 기업들은 점차 복장규정이 완화되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2008년 “직원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비즈니스 캐주얼’을 도입했다. 고객을 대면하는 영업부서를 제외한 부서의 남성 사무직원들에게 정장과 구두 대신 일반 재킷이나 체크무늬 셔츠가 허용됐다. 위아래 색이 다른 ‘콤비’도 가능하다. 면바지, 청바지, 라운드 티셔츠 등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취지다. 여성 직원도 미니스커트를 제외하고 자유롭게 입는다. LG도 이처럼 넥타이 없는 정장이나 콤비 스타일을 권장한다.

을 쓴 패션연구가 이선배씨는 “인간에게 직관이란 뇌기능이 있는 탓에 색채, 형태, 질감으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가 정치인에게 연설만큼이나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다”라며 “이윤 창출, 사회 기여 등 목적에 따라 사회적 드레스코드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구별의 드레스코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옳음과 그름, 바람직함과 저열함, 부자와 가난한 자가 드레스코드를 따르느냐 아니냐로 구별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의복·스포츠·음식 등 일상의 취향이 어떤 계급에 소속돼 있는지 입증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돈이나 부동산 등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취향이 계층을 가른다는 취지다. 부르디외를 연구한 김동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런 ‘구별의 드레스코드’ 사례로 최근 신라호텔에서 벌어진 ‘한복 제지’ 사건을 들었다.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지난 4월12일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거부당한 사건이다. 김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패션은 서로 다른 집단을 나타내는 표지”라며 “신라호텔 사건은 한복이 낡은 것, 부정돼야 할 것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이선배씨는 “한복이라서 거부한다는 논리는 말이 안된다”라며 “디자이너 이혜순씨가 얼마나 부피가 큰 한복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흔히 입는 6폭, 9폭 정도의 한복이면 입장해도 무방하며 폭 넓은 치마라도 식당에서 허리띠를 준비하는 등 합리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라호텔뿐 아니라 국회에서도 한복은 낡고 부정돼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강기갑(58)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농민운동을 하던 1990년대 초부터 개량한복을 입었다. 2004년 6월 초 17대 국회 첫 등원날 국회 입구에서부터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강 전 대표는 평소처럼 긴 수염에 개량한복 차림이었다. 승용차도 없었다. 강 전 대표는 “당시 경비 책임자에게 ‘서민은 막고 자가용 타고 양복 입으면 통과시키느냐’고 강하게 항의했다”며 “17대 국회 때도 김원웅 전 의원이 광복절날 빼먹지 않고 한복을 입었을 뿐 대부분 의원들이 ‘용기를 못 내겠다’며 한복을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 전 대표는 17대 등원 뒤 개량한복 대신 두루마기를 입었고, 지금도 여전히 두루마기를 고집한다. 강 전 대표는 “헐렁해서 피부 호흡에도 좋다. 한나라당 의원 중에 ‘한복을 입어보고 싶은데 눈치가 보이고 용기가 안 난다’고 하는 분도 꽤 있다”고 전했다. 국회에서 ‘권위 있고 바른 것’은 양복이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2003년 당선돼 면바지를 입고 등원했을 때 한나라당 의원 수십 명이 집단 퇴장한 사건은 유명하다.

옷입기는 진보-보수의 싸움터

이 때문에 한국인의 과도한 양복과 넥타이 고집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부르디외를 연구한 홍성민 부교수는 “양복 집착 뒤에 ‘서구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분석했다. “옷이 집단적 차별을 만드는 건 유럽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넥타이를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신라호텔 사건의 경우 우리 사회의 독특함이 추가된다. 하필 한복이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 즉 한국인의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다. 아무리 고급 옷이라도 한복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양복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와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거다.”

홍 부교수의 비판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삭발하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을 교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나이와 역할에 대한 복장규정이 강하다. 또한 그 규정이 어딜 가나 양복이며 넥타이다. 보이지 않는 문화적 지배가 심각하다. 우리 사회가 제도적 민주화는 이뤘지만, 일상생활의 민주화가 시급하다.”

홍 부교수는 세미나 자리에서도 청바지와 개량한복 상의를 일부러 고집한다고 밝혔다. 부르디외를 연구한 학자답게 그에게 옷입기는 진보-보수의 싸움터다. 전투는 날마다 계속된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파트리스 보네위츠·동문선), (이영재·은행나무), (마릴린 혼 등·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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