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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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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떠난 건축의 사회적 실천가

대장암 투병하다 영면한 ‘협치 철학’의 가난한 공공건축가 정기용…

병구완하려던 ‘응원전’은 유지 잇는 ‘추모전’이 돼
등록 2011-03-16 18:46 수정 2020-05-03 04:26

건축가 정기용 선생이 영면했다. 향년 66살. 대장암으로 병석에 누운 선생의 쾌유를 비는 전시회 ‘정기용 응원전’의 팸플릿 인쇄가 막 끝난 참이었다. ‘응원전’은 ‘추모전’이 되었다.
정기용 선생은 가난하게 죽었다. 임정희 문화연대 공동대표는 병석에 눕고 나서야 건축가인 그가 집도 절도 없는 신세임을 알았다. 치료비도 넉넉지 않았다. 5년 전 대장암 수술이나 항암 치료 때도 주위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숨겼던 그다. 임 공동대표가 직접 나서 주위의 예술가들에게 연락하고, 그의 창고로 찾아가 직접 작품들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응원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건축가 정기용. 사진 한겨레 신소영

건축가 정기용. 사진 한겨레 신소영

건축의 공공성에 주목했던 그

정기용은 어느 큰 건축사무소 못지않은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러나 가난했다. 그것이 수수께끼다.

‘무주 프로젝트’는 정기용의 철학이 실제화된 평생의 역작이다. 전북 무주군과 함께 도서관, 운동장, 군청을 지었다. 원칙은 ‘주민의 쓸모’였다. 땅의 기후와 풍토에 걸맞게, 놓일 풍경에 맞춰, 그리고 공공건물을 사용할 사람의 필요에 따라 지었다. 진도리 마을회관에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찾아갈 목욕탕을 지었다. 무주 공설운동장은 등나무로 관람석을 덮어, 경기가 없더라도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군청 앞마당과 벽에는 담쟁이를 심고, 자동차를 지하로 집어넣고 마당을 만들었다.

TV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기적의 도서관’ 설계도 정기용이 했다.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의 도서관이다. 달팽이를 얹은 정읍의 도서관에는 알록달록한 무지개 터널이 있다. 순천의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굴 속에 숨은 듯 은밀하게 뒹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필요를 읽었다. 그는 이를 ‘협치의 건축생산 방식’이라고 정리했다.

부산 민주공원, 계원조형예술대학, 서울예술대학 드라마센터, 순천 노인요양원, 영월 구인헌, 출판사 열림원 사옥, 코리아나 아트센터 등 곳곳에 그의 협치 철학이 숨어 있다. “집은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관계의 시작이며 근거”이고 “사유지 안에 세워지는 건축은 동시에 지구 위에 구축되는 건축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태생이 공공적이다. …작가적인 의식에서든 건축가로서 윤리적인 실천이든 건축 행위는 그 자체가 사회적 실천이기도 하다.”(정기용, ‘감응’전 도록)

정기용의 가난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는 딱히 호명할 수 없는 ‘공공’에 건축을 ‘수주’받았다. 필요한 곳에는 ‘수주’라는 개념 없이 설계하고 지었다. 지역 여성들이 모여 ‘공공의 시설’을 상상하는 곳에 달려가 설계도를 그려주었다. 정기용의 가난은 ‘한국 공공건축’의 가난이기도 하다. ‘협치의 공공’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서울 광화문 광장 ‘공간 정의’를 가장 먼저 고민하고 제안했지만, 관광객이 몰려드는 광장엔 왕조의 영웅들 동상이 들어섰다.

지난해 정기영의 건축을 정리한 ‘감응’ 전시가 끝나고 나서 병이 알려졌다. ‘감응’전은 건축가가 미술관을 빌려 한 전시로는 처음이다. 전관을 다 빌려 그의 역작들을 파노라마로 엮었다. ‘감응’전의 전시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로 갔다.

그의 병을 구완하려던 전시는 유지를 잇는 전시가 된다. ‘추모전’에는 정기용의 드로잉 14작품과 그가 소장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걸린다. 안창홍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와 연작, 건축가 김수근의 드로잉, 민정기의 , 노정란의 , 현금원·김용태의 작품 등이다.

‘기적의 도서관’ 어린이들이 보낸 엽서도 전시

배영환, 박찬경, 임옥상은 각각 화랑 전속 작가인데, ‘이해’를 털어내고 작품을 기증했다. 구본주, 김대중, 김봉준, 김용익, 김인순, 김정헌, 김진송, 노순택, 노정란, 민정기, 박재동, 서상환, 성금자, 안규철, 안상수, 안성금, 윤명순, 윤석남, 이시우, 이윤엽, 이자경, 이정순, 조건영, 조성룡, 주완수, 주재환, 최진욱, 황세준이 작품을 보탰다. 전부 80여 점에 이른다. ‘기적의 도서관’ 어린이들이 보내준 엽서와 편지도 걸린다. 작가들의 양해를 구해 낮은 가격을 붙였다. 서울 북촌미술관이 전시장을 무료로 내줬다. 3월16일(수)부터 21일(월)까지 뿔뿔이 흩어지기 전의 작품을 모아 볼 수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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