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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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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을 위하여

<한겨레21> 제2회 ‘손바닥 문학상’ 가작
등록 2010-12-02 11:18 수정 2020-05-03 04:26
기민호사랑은 열매를 맺고

구청장은 뒤늦게 야동의 맛을 알았다. 한 달 전 회식 자리에서였다. 지역 예비군 동대장이 그에게 경례와 함께 종이봉투를 건넸다.

“구청장님. 이거, 이상하게 생각 마시고.”

동대장의 은밀한 목소리에 구청장은 봉투를 모른 척하고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때와 장소를 구분해야지.”

동대장은 봉투를 반으로 접어서 구청장이 깔고 앉아 있는 방석 밑으로 밀어넣었다.

“이번에 저희 소대에 신병이 왔습니다. 뭐하다 왔느냐고 물어보니 용산에서 컴퓨터 조립해주는 일을 했답니다. 그 녀석이 저한테 준 겁니다.”

구청장은 헛기침을 하면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뭔데?”

“약입니다.”

동대장이 다시 경례를 붙였다.

“젊어지는 약.”

동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종이봉투에는 작은 USB 메모리가 들어 있었고 그 메모리 안에 최신 야동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젊음의 엑기스, 그 자체였다. 서재에 있는 컴퓨터에서 별 생각 없이 동영상을 재생시켰던 구청장은 급하게 볼륨을 조절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새로운 영상 문화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구청장은 그날 실로 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다 된 와이프하고는 상상할 수도, 시도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쾌감이었다.

“4년 만인가?”

그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

일주일 후, 구청장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서재에서 하는 것보다 구청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하는 것이 훨씬 흥분된다는 것. 둘째, 고화질 파일을 돌리기엔 구청 컴퓨터가 너무 구형이라는 것. 구청장은 느리게 재생되면서 화면이 끊기고, 영상과 소리가 어긋나는 현상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자신의 새로운 취미, 이 기가 막힌 스트레스 해소법을 좀더 원활히 즐기고 싶었다.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이게… 이거 또 고장이네.”

인터폰 버튼은 종종 말썽을 부렸다. 구청장은 어린아이들이 오락기를 다루듯 버튼을 눌러댔다.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또 다르다, 정보화 시대에 우리 구민들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공공기관들은 아직도 느리다, 이런 말이에요. 과장님도 잘 알겠지만 뭐든지 빠르고 최신식으로 해야, 인정받는 시대 아니겠어요? 구청 시스템이 구민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에는 너무 느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려면 구청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예산이 말이야. 책정이 안 됐죠? 언제 구입한 건데 아직도 바꿀 때가 안 됐어? 보니까 아직 한 2년은 더 쓰게 돼 있더라고. 이게 말이 되느냐. 이런 낡고 비효율적인 부분은 과감히 바꿔야 한다, 이게 내 생각이에요. 일단 실험적으로 말이지, 위에서부터 과장급까지만. 한 오십 대 되나? 내 말 알겠어요? 조달청에는 내가 말해보려니까.”


“구청 시스템이 구민의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에는 너무 느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려면 구청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해야 된다, 이런 말이에요.”

구청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내려다보였다. 누군가 시작 신호만 주면 도미노 세계 신기록이라도 세워질 것만 같았다.

“원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거니까. 구민을 위해서. 어디 한번 잘 착수해보세요.”

기획예산과 과장은 구청장의 뒷짐 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이런 상황에서 저와 같은 포즈를 취해보리라 다짐했다. 그날 저녁, 구청에서 비상회의가 소집됐다. 기획예산과와 주민생활지원과 직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유의지로 전원 야근했다. 그리고 다음달 구청 소식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정성이 희망으로 자라납니다.
행복을 더하는 따듯한 세상 만들기에 참여해요!
극심한 경기 불황으로
우리 모두 더 움츠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십시일반 보내주시는 성·금품은 사랑의 열매가 되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구청에서는 업무용으로 사용해왔던 공용 컴퓨터(본체)를
구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는 행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일시: ××××년 ×월 ×일 오전 10시
장소: 구청 앞마당
주민생활지원과 ☎××××-1004
※선착순 마감
인간시대 고물 할머니 편할머니는 오늘도 리어카에 고물을 싣습니다. 남들이 버린 쓰레기도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됩니다. 고장난 TV, 신다 버린 신발 한 짝, 폐휴지. 할머니는 참 열심히도 고물을 모으십니다. 고물상에 가져가면 3천원 벌이는 된다고 환하게 웃으십니다. 손자들 용돈 줄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하시네요. 저런, 오르막길입니다. 할머니의 얼굴에 근심이 쌓입니다. 힘겹게 오르막을,

“잠깐! 잠깐요!”

PD가 오르막을 오르는 할머니를 멈춰 세웠다. 노인이 주춤하자 리어카가 뒤로 쏠렸다. VJ가 급하게 리어카 뒤에 붙었다.

“우리 할머니 힘도 좋으시네. 숨 안 차세요?”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를 리어카에 기댔다. PD는 촬영을 진행시키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아주 정정하셔서 뭐. 오르막이고 뭐고 그냥 오르시니까. 보기 좋습니다. 보기 좋아요.”

그때 PD의 눈에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어 보였다. 그가 크게 손짓하며 소리쳤다.

“야! 니네 일로 와봐.”

초등학생들이 멀리서 물었다.

“왜요?”

“돈 줄게, 이리 와봐.”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리어카 쪽으로 달려왔다. PD는 아이들을 리어카 옆에 세웠다.

“여길 올라가다가 할머니를 발견하는 거야. 알겠지?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리어카 뒤에 붙어. 알겠지?”

PD가 지시를 내리자 가장 키 큰 아이가 물었다.

“돈은요?”

“이 자식들 이거.”

그가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공짜로 TV에 나오는 거야. 싫어?”

동네 꼬마들이네요. 평소엔 장난꾸러기들이지만 이럴 땐 착한 아이들이 됩니다. 아이들이 밀어주니 영 꼼짝 안 할 것 같던 리어카가 조금씩 오르막을 오르네요. 영차, 영차. 할머니도 힘을 냅니다. 이 오르막길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할머니는 그것을 희망이라 생각해봅니다.

“야! 여기선 로 앵글로 잡아야지. 장사 하루이틀 해!”

PD의 호통에 VJ가 무릎을 꿇고 캠코더를 밑으로 내렸다.

“좋아. 애들은 자연스럽게 빠지고. 인사하면서, 인사하면서!”

고물값이 많이 내렸다고 합니다. 특히나 폐휴지는 할머니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네요. 무게로 돈을 따지는 고물상에선 TV 같은 가전제품이나 고철이 가장 값나가는 물건입니다. 그래도 2천원을 받아쥔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네요. 저것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할머니는 구석에 앉아서 고물상 주인이 준 요구르트를 홀짝였다. PD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자신이 얼마 전에 금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VJ가 PD에게 다가와 담배를 한 개비 건넸다. PD는 받은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가 한숨과 함께 돌려주었다.



“컴퓨터를 받아 오면 여기 마지막 장면에 말이야. 할머니를 담는 거야. 리어카엔 컴퓨터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뒤로 대학생들이 물결처럼 따라오는 거지. 페이드인, 깜짝 놀라는 고물상 주인 얼굴 클로즈업하고, 오버랩,”

“너 오늘 제대로 못하냐?”

“안 피우세요?”

“노인네가 고물 파는 게 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2천원이 뭐냐, 2천원이. 너무 적게 받으니까 오히려 현실성이 없다고. 이거, 안 돼. 시청률 못 뽑아. 옛날에 불우이웃 코드가 왜 통했는지 알아? 그 사람들, TV에 얼굴 한번 나오면 인생 폈거든. 살 데 없으면 집 지어주고, 망했으면 창업해주고. 인생을 완전히 업그레이드해줬다고. 그땐 매주 집 한 채씩 지어주고 그랬어. 시청자는 그 맛에 보는 거야. 돈지랄을 해야 좋아들 한다고. 그런데 지금은 방송사에서 그렇게 돈을 쓰나? 안 그래도 경기가 나빠져서 말이야. 이제 TV에 나오면 그냥 나왔다뿐이지, 서프라이즈가 없다고. 좋아들 하겠어?”

다양한 사람들이 고물상으로 들어왔다. 장바구니에 병하고 깡통을 담아오는 아줌마도 있었고, 1t 트럭에 분유 깡통을 가득 실고 들어오는 남자도 있었다.

“너, 이건 아닌데 싶을 때 있냐? 난 말이야. 원래 기자가 되고 싶었어. 9시 뉴스에도 한번 나가고 말이야. 뭔가 사명을 가지고 방송사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근데 이건 대충 제보받고 한 3일 붙어 지내다가 감동적인 MR 한 번 깔아주면 끝이야. 주부들 눈물 짜내는 거 말곤 아무 사명도 없다고.”

“전 나름 보람 있는데요?”

한숨을 쉰 PD가 팔짱을 꼈다가 VJ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야, 아까 담배 다시 줘.”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아까 할머니 폐휴지 보니까 말이죠. 광고가 있더라고요. 구청에서 컴퓨터를 나눠주나 봐요.”

“새끼야. 요즘 컴퓨터 없는 집이 어딨냐? 할머니가 컴퓨터 배워서 뭐? 계몽 코드도 한물간 지가 언젠데.”

“그게 아니라요. 그게 다 고물이잖아요. 그걸 할머니한테.”

“고물?”

“개당 10만원씩만 잡아도 열개면 100만원이잖아요.”

대한민국에 카메라 들이밀어서 안 되는 일이 있던가? PD는 이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느꼈다.

“그거야, 그거라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애들로 한 열댓 명 섭외하자고. 독거노인을 위해 대학생들이 뭉쳤다! 이런 느낌, 알지? 응? 이런 타이틀로 가자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봉사를 하고 싶다, 여자친구와 함께 참여했다, 추억을 만들고 싶다. 걔네들 상반신 5초 인터뷰로 1분 채우고. 왜 그런 느낌 있잖아.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그런 느낌. 그거 살리면서 구청과 대학생들 사이에 협조가 된 거처럼 말이야. 그렇게 가자고. 컴퓨터를 받아 오면 여기 마지막 장면에 말이야. 할머니를 담는 거야. 리어카엔 컴퓨터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뒤로 대학생들이 물결처럼 따라오는 거지. 페이드인, 깜짝 놀라는 고물상 주인 얼굴 클로즈업하고, 오버랩, 이게 카운트가 돼야 해. 킬로수 재는 거 알지? 카운트. 슬로, 카운트. 할머니 손 클로즈업, 100만 원 들리고, 대학생들 박수 치고, 하이앵글, 고물상 잡고, 전체 환호, 페이드아웃!”

VJ가 박수를 친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통과됐기 때문이다. PD는 그 박수를 자신의 연출력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는 엄한 확신을 가지고 곧바로 제작부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좋다, 기분이다! 할머니. 이번에 저희가 힘 한번 써드릴게. 응? 좋죠? 100만원 번 적 있어요? 100만원.”

PD가 여기 돈이 있다는 듯이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할머니는 요구르트 마시는 것도 잊고 PD의 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좌회전을 꿈꾸는 사람들

구청과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4층짜리 상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곳 지하실엔 낯선 남녀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열댓 명까지. 그들은 수시로 지하실을 드나들었다. 한번 모이면 새벽까지 계속 이어지는 정체불명의 모임. 지하실에서는 간혹 고성도 터져나왔다. 그러면 길을 가던 행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특히 오늘은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지하실에 모였다. 정면 벽에는 ‘행동하는 시민단체 좌회전을 꿈꾸는 사람들 초대회장 선거 연설’이라는 기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박수 소리가 지하실에 울리고 한 후보가 현수막 아래로 나섰다. 그는 비쩍 마른 몸에 안경을 쓰고 있어서 매우 호리호리해 보였다.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에서 강단이 엿보였다.

“인터넷 모임으로 시작한 우리 좌회전을 꿈꾸는 사람들. 줄여서 ‘좌꿈사’라고 합시다. 좌꿈사가 회원들의 십시일반으로 이렇게 번듯한 사무실도 차리고. 이제 초대회장을 선출하는 때가 와서 참으로 기쁩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운영진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회원들은 이 선거가 형식적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누가 초대회장으로 뽑힐지 이미 알고 있었다. 새싹등급에서 특별회원까지 그 누구보다 빠른 승급을 보여주었던 사람. 단순히 좌회전 금지가 불만이어서 모인 사람들에게 ‘행동하는 시민’이라는 개념을 심어준 사람. 연설을 하고 있는 바로 그였다.

“저는! 국가음모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원들은 그가 스스로 밝힌 프로필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 학력은 고졸이었다. 그는 자신을 독학자라 말하길 좋아했다. 그의 인터넷 프로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스승이자 가장 친한 친구, 범우문고에게 감사합니다.’

“왜! 점점 좌회전을 할 수 있는 구간이 없어지고 있느냐. 왜! 좌회전하기가 이렇게 힘드냐!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우회전은 다 됩니다. 신호가 없어도 아무 때나 우회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회전은 신호를 받아야 하죠. 이 좌회전 신호등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여기 벌금 한번 안 물어본 회원님 있습니까? 45일 면허정지 한번 안 당해본 회원님 계십니까? 저는 억울해서 나왔습니다. 벌금 물고, 면허정지당한 게 분하고 억울해서 우리 좌꿈사에 가입했습니다.”

그에게는 군대를 두 번 갔다 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장교로 한 번, 병사로 한 번. 장교 시절 억울한 누명으로 임용이 취소됐는데 그로부터 5년 뒤 재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는 것이다. 회원 중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했다. 고졸 출신의 장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문과 억측은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대부분의 회원은 학력위조설을 믿었다. 원래 명문대 출신인데 어떤 집회로 지명수배가 되자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짓 프로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갖가지 소문은 남자가 공무원 사회를 극도로 증오하는 것에 훌륭한 근거가 되었다.

“여러분! 우리는 막무가내 집단이 아닙니다. 버스전용차선이 있거나, 차선이 갑자기 줄어드는 곳에서 좌회전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야 얼마든지 양보할 여유가 있는 게 우리들 좌꿈사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의문은 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도로에서조차 좌회전이 금지돼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고, 악독하기로 유명한 ××천 8가! ××역 사거리! ××여대입구에서 ××로 가는 그 길목!”

야유가 쏟아졌다. 도로에 대한 야유. 그에겐 회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개미지옥입니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좌회전 표지가 없어서 20분을 돌아가야 합니다. 주유소에 한 번 가려면 도시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운전자가 불법으로 좌회전을 하고, 벌금을 물고, 면허정지를 당합니다. 운전자들 잘못이 아닙니다. 불법으로 좌회전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놓은 도로가 나쁜 겁니다. 저는 여태껏 많은 민원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몇 년째 처리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입니다. 그들! 철밥통에 배불리고 관료주의에 찌든 공무원들!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부는 얌전한 시민에게 절대로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남자의 가장 큰 공로는 회원들에게 자신들이 정부의 얌전한 애완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시켰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이면 모든 교육과 의료가 무료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일단 그의 얘기에 수긍하자 회원들에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대학교 등록금이 물가상승률보다 비싼가? 왜 초등학교 무료급식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가? 왜 해마다 멀쩡한 보도블록을 뒤집어엎는가? 그 돈은 다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부당한 세금, 부당한 법규. 대한민국은 썩은 사과였고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은 정부를 방관한 자신들의 책임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개미지옥에서 한 해에 벌어들이는 부당한 벌금만 해도 도대체 얼마입니까? 계산이 불가능한 천문학적인 액수! 국회에서 거덜낸 국가 예산을 그런 식으로 쥐어짜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좌회전 신호등을 설치 못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안 하는 겁니다. 국민에게 벌금을 쥐어짜기 위한 의도적인 개미지옥! 그 더러운 국가 음모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좌꿈사는 움직여야 합니다. 구호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으로 점점 줄어가는 좌회전 구역을 사수해야 합니다. 자! 이것을 보십시오. 오늘 아침 구청 소식지를 보면서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구민에게 공짜로 컴퓨터를 나눠준다는 내용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지독한 예산 낭빕니다. 아직 쓸 만한 컴퓨터를 버리고 새 컴퓨터를 구입하겠다는 겁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구청이 어딥니까? 바로 옆에 있는 저 구청!”

남자가 손가락으로 지상을 가리켰다.

“아까 얘기한 3대 개미지옥에서 두 곳이나 관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저 구청입니다. 우리가 괜히 이 지역에 사무실을 차렸겠습니까? 저 구청은 우리의 민원을 무시하면서 엉뚱한 곳에다 세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다. 회원들은 구청이 자신들의 데뷔 장소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여러분! 저를 회장으로 뽑아주십시오! 그리고 모입시다! 그들을 규탄하고, 우리의 좌회전을 우리 손으로 얻어냅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후보자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좌회전 만세!”

인간이 태어나면 변태도 태어나고

남자가 검은색 옷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발부터 모자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인 그의 옷차림은 불행히도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게다가 등에 매고 있는 파란색 등산 배낭은 그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시장 뒷골목을 배회하던 남자는 한 전파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전파사는 간판만 걸려 있을 뿐 오랫동안 장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창문은 노랗게 색이 바랜 1990년대 달력들로 도배됐고 출입문 손잡이에는 청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그는 달력 속 여자가 입고 있는 줄무늬 팬티를 바라보다가 가운데 손가락을 빳빳하게 세워서 사진 속 여자의 그곳에 갖다 댔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코끝으로 가져와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신음. 기다란 신음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달력 속 여자 때문이 아니었다. 짧은 유희를 즐긴 그는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고 출입문 손잡이 뒷면에 숨겨진 작은 벨을 눌렀다. 짧게 두 번, 길게 세 번.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자는 다시 한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 좌꿈사는 움직여야 합니다… 자! 이것을 보십시오. 오늘 아침 구청 소식지를 보면서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구민에게 공짜로 컴퓨터를 나눠준다는 내용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닙니다. 지독한 예산 낭빕니다.”

실내는 창문을 막아놓은 탓에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했다. 사방에 조립식 철제 수납장이 세워졌고, 그 안에 온갖 가전제품과 폐물이 가득했다. 호랑이 형상의 청동 장식품에서 재봉틀 기계까지. 그야말로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풍물시장 같은 곳이었다. 남자는 수납장을 지나 오른쪽 구석에 설치된 카운터 앞까지 걸어갔다. 카운터 안쪽에는 골방으로 이어지는 작은 쪽문이 있었는데 입구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가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골방 쪽문이 열리며 중년의 대머리 사내가 커튼을 비집고 카운터로 나왔다. 그가 길게 하품을 하며 머리를 긁었다.

“뭔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해? 좀 쉬엄쉬엄 해.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오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다 몸 상한다. 우리 일은 몸이 재산이야.”

남자가 대머리 사내에게 배낭을 들이밀었다.

“왜? 싫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뭘 그렇게.”

대머리 사내가 배낭을 끌러서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밖으로 꺼냈다. 하드디스크, 램, 메인보드, 그래픽카드가 그의 투박한 손에 들려 나왔다.

“또 컴퓨터야?”

그가 컴퓨터 부품들을 스탠드 불빛에 비춰보았다.

“너 요즘 왜이래? 이거 장사 안 돼. 요즘 폐업하는 PC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중고 컴퓨터가 아주 썩어난다고. 이런 거 말고, 차라리 주방용품이나 폐물로 가져와. 골프채면 더 좋고.”

“폐물 좋아하시네. 늙다리들은 모르는 세계가 있어요.”

“내가 이 생활만 15년짼데 모르긴 뭘 몰라? 나 프로야. 프로페쇼날. 몰라?”

“프로페쇼날은 모르겠고 프로테스트는 있는데, 한번 받아볼래요?”

“테스트?”

“아저씨하고 젤 친한 친구가 죽었어. 뭘 해줄래요? 뭘 해줘야 죽은 친구에게 위로가 될까?”

“이 새끼가 재수 없게.”

“테스트라니까.”

“죽었으면 끝이지 뭔 위로를 해줘? 딴 거 없어. 양심껏 부주하는 거지. 별 기억도 없는 놈이면 3만원. 얼굴이나 아는 사이면 5만원. 친구면 10만원.”

“그깟 돈. 죽었는데 돈이 밥 먹여준답니까? 정답은요. 친구가 쓰던 컴퓨터를 포맷해준다, 이겁니다. 모르겠어요? 참 나, 그 멍한 표정하고는. 프로라면서 아직도 감이 안 와요? 잘 들어봐요. 내가 얼마 전에 자취방을 하나 털었다고. 여대생 둘이 사는 집인데 한 명은 펭귄같이 뚱뚱해가지고 볼품없고, 다른 한 명은 곱상하게 생긴 게 여대생 티가 좀 나더라고. 왜 못생긴 애들이 꼭 예쁜 애들이랑 젤 친하잖아. 알죠? 아무튼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한 3∼4일 지켜봤는데 이것들이 초저녁엔 둘 다 외출을 하더라고요. 받은 밥상이지 뭐.”

남자는 여대생 둘이 모두 외출한 것을 확인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자취방 도어록이라고 해봤자 한 손으로 열 수 있을 만큼 조악했다. 그는 제 집 들어가듯 방에 침입했다. 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지저분했다. 가방이며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구석엔 화장실 하수구를 연상시킬 만큼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화장대 서랍도 반쯤 열린 상태였다. 그는 슬쩍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변기 쪽에 피가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이내 문을 닫아버렸다. 그 핏방울이 자신의 첫 자위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 역 근처에 있는 쪽방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옆방에 한 신혼부부가 이사왔는데 그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벽이 너무 얇아서 매일 새벽마다 새색시의 신음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는 옆에서 자고 있는 엄마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 낯설고 이상한 소리에 몰두했다. 이튿날, 아이는 작은 송곳을 하나 구해서 자신이 눕는 쪽 벽에 구멍을 하나 뚫었다. 어떤 짓을 하면 그런 소리가 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그 구멍으로 맨 처음 본 것은 기저귀 같은 것을 벗고 있는 여성과 음부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남자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곧바로 견적을 냈다. 컴퓨터 아니면 노트북이었다. 다른 물건들은 가져가봤자 적자일 게 뻔했다. 그는 벽에 붙어 서서 조심스럽게 창밖을 확인했다. 아직 초저녁이라 육안으로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눈에 띄는 장물은 자제하는 것이 좋았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자취방을 탈출했다.

“너 여자들한테 인기 없지? 어렸을 때 여자들은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고. 응? 그렇게 환상을 가지고 있으면 여자 앞에서 언다. 얼면 소심해져. 여자는 소심한 남잘 젤 한심하게 생각한다고. 웃기고 즐겁게 해줘야 함 주는 게 여자야.”

환상이라는 말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얼긴 누가 얼어요? 이게 있는데.”

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쥐어 올렸다.

“내 얘기는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시 갑니다. 잘 들어봐요.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궁금한 거예요. 이 노트북이 누구 건지. 펭귄인지 청순인지.”

남자는 노트북을 켰다. 바탕화면에 대여섯 명이 어울려 찍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친구들끼리 찍은 사진인 듯했다. 남자는 사진 속에서 그 청순한 여대생의 얼굴을 발견했다. 룸메이트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내 문서 폴더를 클릭했다. ‘예술론’이라는 이름의 폴더가 눈에 띄었다. 폴더를 클릭하자 동영상 파일 두 개가 나타났다. ‘인간 예술’과 ‘동물 예술’이었다. 그는 인간 예술이라고 쓰인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동영상이 재생되면서 화면에 한 흑인이 나타났다. 알몸 차림의 그 흑인은 자신의 남성에 얼핏 젖병처럼 보이는 도구를 끼웠다. 그가 말했다.

“I’m Ready.”

이어 백인 여자 두 명이 화면에 나타났다. 물론 알몸이었다. 그녀들이 남성의 물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피스톤처럼 생긴 기계를 펌프질했다. 그러자 흑인의 물건이 점점 더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장에 닿았어요.”

“거짓말.”

“맹세할 수 있어요. 자지가! 천장에 닿았다고요!”

“헛소리 그만하고 돈이나 챙겨.”

대머리 사내는 카운터 아래에서 돈을 꺼내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는 받은 돈을 그 자리에서 세기 시작했다.

“요즘은 말이죠. 포르노를 장롱이 아니라 하드에 보관하는 시대라고요. 비밀 일기가 금고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컴퓨터 속에 있다고. 그걸 훔쳐보는 게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 알아요? 한 개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훔치는 거라고요. 청순한 얼굴의 여대생이 밤마다 변태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한다고 생각해봐요. 창녀보다 낫지! 내가 그날 밤 몇 번이나 싼지 알아요?”

“야,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야동 같은 거 한 번 보고 다 지운다고. 중고시장에 나오는 건 거의 다 포맷돼 있는데 거기서 무슨 비밀을 찾겠다고.”

“복구 프로그램은 멋으로 있는지 아시나. 내가 또 기술이 있으니까. 내 실력 알잖아요. 어, 잠깐. 이거 만원 덜 준 거 아니에요?”

“만원 값은 정보료야.”

대머리 사내가 남자에게 구청 소식지를 내밀었다.

“이깟 동네 신문이 만원이라고요?”

“거기 너 같은 변태가 환장할 만한 정보가 있다. 잘 찾아봐.”

남자는 돈을 챙기고 배낭을 다시 어깨에 멨다. 그가 막 나가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대머리 사내가 소리쳤다.

“잠깐만!”

남자가 뒤돌아봤다.

“그… 동물 예술은 뭐였어?”

중년의 대머리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벗겨진 그의 이마가 개기름으로 번들거렸다.

구민을 위하여08:56

“구청장님. 입구에 웬 사람들이.”

구청장은 운전기사의 말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구청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군중은 어림잡아도 100명이 넘어 보였다. 그는 구민들의 호응에 조금 놀랐다. 자신 때문에 기획된 행사이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뒷문으로 가게.”

운전기사는 구청 정문을 그대로 지나쳐 뒷문 쪽으로 차를 몰았다. 창밖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스쳐 지나갔다. 구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 정도 반응이면 내년 선거도 문제없겠는데?’

심각했던 구청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요즘은 말이죠. 포르노를 장롱이 아니라 하드에 보관하는 시대라고요. 비밀 일기가 금고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컴퓨터 속에 있다고. 그걸 훔쳐보는 게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 알아요? 한 개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훔치는 거라고요.”
09:12

도둑은 화단에 걸터앉았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의 검은색 옷은 여전히 눈에 잘 띄었다. 사실 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경쟁자가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에게 사람이 많은 곳은 항상 불안한 장소였다. 고질적인 직업병. 죄를 지으러 온 것도 아닌데 얼굴이 경직되고 손끝이 떨렸다. 게다가 그의 눈에 동종 업계 사람도 몇 명 보였다. 장물아비 가게에서 종종 마주친 얼굴들이었다. 오늘의 자선행사는 도둑들에게 무료급식과도 같았다. 선량한 시민처럼 얌전히 줄을 서기만 하면 며칠간 일을 쉴 수 있는 특수였던 것이다.

‘아마추어 같은 것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구청 입구로 향했다. 그는 깨달았다. 도둑은 차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나눠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쌓여 있는 컴퓨터를 그냥 들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구청 로비로 들어온 그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기, 오늘 나눠주기로 한 컴퓨터 말인데요. 어디 있죠?”

09:15

구청장은 책상에 설치된 새 컴퓨터를 보았다. 그는 평소와 같이 양복 상의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차분히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빠르다, 빨라.”

그는 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에 피가 돌고 가슴이 쿵쾅이는 느낌. 태어나서 처음으로 빨간 잡지를 접했을 때의 그 흥분. 그간 쌓여온 욕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출구를 찾고 있었다. 구청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생각할 게 있으니까. 10시… 아니, 11시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아요. 알겠지?”

구청장은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한 가지만 빼고.

“이걸 잊으면 안 되지.”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노이즈를 줄이기 위해 단자를 금도금한 최고급 헤드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09:30

남자는 구청 경비로 일한 지 1년이 조금 안 되는 신참이었다. 그는 초소에 앉아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노인들, 청년들, 아이들, 아줌마에서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구성원도 다양했다. 자선행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의 군중이 모일 것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는 무전기로 실내 경비를 맡고 있는 동료를 불렀다.

“선배님? 보고 계세요? 말도 마세요. 행사 때문인 거 같은데. 혹시 오늘 준비된 컴퓨터 몇 댄지 알고 계세요? 예. 좀 알 수 있을까요? 기다릴게요.”

남자는 동료의 무전을 기다리면서 군중 수를 세어보았다. 그의 셈이 막 300명을 넘겼을 때 무전기에서 동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무전을 받았다.

“몇 대라고 그래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동시에 군중 틈에서 휘날리는 깃발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행동하는 시민단체
좌회전을 꿈꾸는 사람들

원래는 자선행사여야 했다. 그런데, 무엇인가 어긋났다.

“경찰… 부를까요?”

10:20

PD는 구청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경찰이었다. 경찰들이 시민들의 구청 진입을 막고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또 다른 한쪽에선 깃발을 지키려는 쪽과 압수하려는 쪽이 실랑이를 벌였다.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깃발을 압수해! 이거 사유재산이라고! 사유재산!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야!”

“미리 허가받지 않은 시위 물품은 모두 압수 대상인 거 모릅니까?”

경찰 셋이 안경잡이 남자에게 달라붙어 깃발을 압수했다. 그는 깃발을 빼앗기자 화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경찰들을 향해 소리쳤다.

“좌회전을 보장하라! 관료주의에 철퇴를!”

“야! 저 새끼 입 막아!”

경찰들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바닥에 눕혀져 질질 끌려가면서도 구호를 멈추지 않았다. 일단 그가 구호를 시작하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좌꿈사 회원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여기저기서 구호가 터져나왔다.

“좌회전을 보장하라! 관료주의에 철퇴를!”

경찰들은 구호를 막기 위해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위자와 일반 시민을 얼마나 잘 구분해낼 수 있을지 경찰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했다. 잡혀가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항의하는 사람이 한데 꼬여 구청 앞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PD는 급하게 안주머니를 뒤져서 방송사 사원증을 찾았다. 그리고 마치 방패처럼 목에 걸었다. 그는 먼저 현장에 보냈던 VJ를 찾기 위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지금 어딨어? 어디?”

PD는 한쪽 구석에 설치된 음료수 자판기 쪽으로 갔다. 자판기 뒤쪽에 VJ가 숨어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이거 안 찍고 뭐해?”

“우린 인간시대지 뉴스가 아니잖아요.”

“못난 새끼!”

PD는 VJ에게서 캠코더를 빼앗아 자판기 틈으로 바깥 상황을 찍었다.

“어쩌시려고요?”

“너 예비 캠코더 한 대 더 있지?”

“6mm짜린데요?”

PD는 들고 있던 캠코더를 도로 VJ에게 넘겼다. 그리고 자신은 손바닥만 한 6mm짜리 소형 캠코더를 들었다.

“넌 계속 찍어. 난 구청장 만나러 간다.”

“에? 왜요?”

“책임자한테 책임을 물어야지! 모르겠냐? 이거 대박이야!”

VJ가 나가려는 PD를 붙잡았다.

“고물 할머니 100만원은 어떡하고요?”

“잘 들어.”

PD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목소리에서 과도한 비장감이 묻어나왔다.

“이거 인간시대에는 못 나가도, 뉴스에는 꼭 나간다.”

10:48

도둑은 본의 아니게 경찰에게 둘러싸인 꼴이 되었다. 컴퓨터 4대를 탑처럼 쌓아서 들고 나온 게 실수였다. 시야가 가려졌던 것이다. 그는 좌우를 살폈다. 경찰, 경찰, 온통 경찰이었다. 당황한 그는 한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직업적 육감. 짐승들이 상대방의 엉덩이를 킁킁대며 정체를 파악하듯, 한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적어도, 도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뛰었다. 시야가 반쯤 가려진 채였지만 단숨에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한 경찰이 반사적으로 그를 뒤쫓았다. 도둑은 사람들 틈을 헤집고 달렸다. 맨 위에 있던 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졌다. 시야가 환해졌다. 눈앞에 화단이 보였다. 그 너머는 도로였다. 도둑은 화단으로 뛰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3대나 들고 화단을 뛰어넘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컴퓨터와 함께 시멘트 바닥을 굴렀다. 바닥에 피가 몇 방울 튀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피투성이가 되었다. 도둑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떨어져 있는 컴퓨터도 보였다. 버려야 했다. 어차피 공용으로 쓰였던 컴퓨터다. 뒤져봤자 별거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이 컴퓨터로 단 한 번이라도 홈페이지나 이메일에 접속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또다시 타인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그의 남성이 발기했다. 도둑은 고개를 숙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변태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사랑하기로 했다. 그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컴퓨터로 몸을 날린 것과 경찰이 도둑에게 몸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PD는 한 장면도 찍지 못한 채로 ‘구청장에게 내시경을 실시하라’는 말만 중얼거리다 시민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20여 명이 다치고 60여 명이 연행된 그날 사건은 ‘좌회전’이라는 과격한 시민단체 탓으로 일단락되었다.
같은 시각

비서는 방송사에서 나왔다는 한 남자를 막아섰다. 그는 목에 건 신분증을 내보이며 지금 당장 구청장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구청장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시간까지 아직 12분이나 남아 있었다.

“이러시면 곤란해요.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세요.”

“비상 상황인 거 모릅니까? 지금 경찰이 시민들을 무차별 진압하고 있다고요!”

“진압이라니요! 말조심하세요. 불법 시위자들을 단속하는 것뿐입니다. 당신 기자 맞아요?”

PD가 목에 건 신분증을 내밀었다. 비서는 자세히 신분증을 살폈다. 보도국이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 사원증이었다.

“뉴스가 아니라 시사교양에서 나오셨어요?”

“모르세요? 그게 그겁니다.”

“카메라는요?”

PD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작은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비서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뭐든 크기가 중요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공문을 보내서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하세요.”

“인터폰이라도 한번 해주십쇼. 방송사에서 인터뷰 나왔다고 물어나 보시라고요.”

PD와의 눈싸움 끝에 그녀는 인터폰을 눌렀다. 이쪽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장님?”

신호를 받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 보라는 듯 PD를 흘겨보고 다시 한번 버튼을 눌렀다.

“청장님. 방송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노이즈와 함께 스피커에서 구청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좋아. 바로 그거야.”

“청장님, 아까 11시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들여보내라는 말씀이신가요?”

“오우, 베이비. 컴온, 컴온 베이비!”

PD는 실랑이도 잊고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힘들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1:00

구청장이 정액을 분출한 것과 PD가 청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구청장으로서는 깔끔한 뒤처리를 위해 준비해온 콘돔에다 사정한 것이 천운이었다. 구청장과 PD는 서로 경직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싸움만 했다. 선수를 친 것은 구청장이었다. 그는 사정한 콘돔을 아주 천천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기에서 빼내었다. 손가락에 눅눅하고 끈적끈적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손에 전해지는 감각을 무시하고 콘돔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먹었다. 증거물을 없앤 구청장은 결재 서류를 펼치고 만년필을 오른손에 쥐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정치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PD는 그때까지도 정확한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정치인의 자위 현장을 포착한 것은 그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위가 무슨 죄란 말인가. 자위는 죄가 없었다.

분주히 상황을 분석하던 PD의 두뇌가 일단 카메라를 들이대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때는 이미 경비가 호출된 뒤였다. PD는 한 장면도 찍지 못한 채로 ‘구청장에게 내시경을 실시하라’는 말만 중얼거리다 시민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20여 명이 다치고 60여 명이 연행된 그날 사건은 ‘좌회전’이라는 과격한 시민단체 탓으로 일단락되었다. 구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던 컴퓨터는 전량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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