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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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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위 보시고는, 자르라 합신다

두 차례 재편집 끝에 개봉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
사실상 개봉 막는 ‘제한상영가’ 제도에 “창작의 자유 침해” 비판 일어
등록 2010-08-18 17:08 수정 2020-05-03 04:26

영화 가 등급 논란 끝에 지난 8월12일 개봉했다.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아 사실상 극장 상영이 어려웠던 영화는 편집과 재심의를 거쳐 개봉 하루 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 겨우 세상에 나왔다. 지난 8월11일 기자시사회에서 김지운 감독은 “영화가 개봉하는 것만으로 감격스럽다”며 등급 판정 논란에 대해 처음 말문을 열었다. 등을 만든 스타 감독의 입에서 나오기엔 어색한 말이었다.
피로 범벅된 화면, 다시 재단하라?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는 약혼녀를 연쇄 살인마에게 잃고 처절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 국정원 요원의 이야기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경철’ 역은 최민식이, 국정원 요원 ‘수현’ 역은 이병헌이 맡아 힘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약혼녀를 살인마한테 잃은 수현은 “약혼녀가 당한 만큼 되돌려주겠다”며 살인마를 찾아낸다. 수현의 복수는 살인마에게 죽는 게 낫다고 여길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 손목을 분지르고,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끊을지언정 그의 목숨을 끊진 않는다. 살인마에게 위치추적용 캡슐을 먹이고 풀어준 다음 그를 잡았다 풀어주기를 반복하며 괴롭힌다. 그동안 살인마는 계속 성폭행과 살인을 자행하고, 복수를 하는 수현의 잔인한 모습도 살인마를 닮아간다.

두 번의 재편집을 거친 영화는 폭력의 강도를 누그러뜨렸다지만 여전히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2시간20분 동안 화면은 시종일관 피로 범벅이 된다.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수현의 심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복수 방법이 쉬이 납득되진 않는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방치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불편하다. 악마적 범죄에 대한 영화의 복수는 몰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제작비 70억원대의 상업영화가 ‘개봉 불가’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건 이런 폭력의 수위 때문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는 “시신 일부를 바구니에 던지는 장면, 인육을 먹고 개에게 주는 장면, 절단된 신체를 냉장고에 넣어두는 장면 등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현저히 훼손한다”며 7월27일과 8월4일 두 차례에 걸쳐 제한상영가 등급을 매겼다.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제한상영관에서만 상영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내엔 제한상영관이 없어 사실상 영화를 개봉할 수 없다. 제한상영가 등급은 사형선고와 같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국내외 영화는 모두 12편으로, 등이다.

영화계는 상업영화의 이례적인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사전 검열 및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영등위의 판정 기준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 논란에 대해 를 만든 김조광수 감독은 “제한상영가는 ‘성인도 못 보는 영화’라는 말도 안 되는 심의 등급”이라며 “영화를 개봉하려면 문제적 장면을 가위질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전 검열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모호한 심의 기준 탓에 영등위의 등급 판정이 논란을 빚은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기 불편해서 등이 이유가 돼 여러 영화가 다양한 관객층을 만나는 데 실패했다. 은 주가 조작을 모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재편집을 거쳐 ‘청소년 관람가’로 개봉했다. 이주노동자 청년과 한국 여고생의 우정을 다룬 는 여고생이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동성애를 다룬 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내려졌다. 제작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현재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성인 관객의 취향과 판단의 문제 건드려

영등위가 제한상영가 판정 이유로 밝힌 의 문제적 장면들 역시 이미 국내에 정식 개봉된 여러 영화에서 표현된 부분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인육을 먹는 장면은 등에서 등장했고, 사체 절단 장면 역시 최근 개봉한 를 비롯해 잔혹 스릴러 영화에서 종종 보는 장면이다. 김지운 감독은 “기존 영화에도 있는 장면인데 (영등위가) 왜 유독 이 영화에만 삭제 요청을 심하게 했는지 모르겠다”며 “두 배우의 연기가 실제 같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영화 개봉 전 불거진 제한상영가 등급 논란은 개봉 뒤 색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의 지나친 폭력성과 잔혹성 탓에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이 이해가 된다는 입장과 폭력의 수위와 등급 논란은 따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 엇갈리는 것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주제나 형식도 새롭지 않고 부족한 문제의식을 폭력의 강도로 때우려 한 영화”라며 “제한상영가 판정을 비난할 게 아니라 하루빨리 제한상영관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혹평했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영화에서 보이는 극단적 폭력이 현실의 폭력을 과장한 것에 불과하다”며 “폭력 수위가 높으니까 상영할 수 없다는 영등위의 평가는 성인 관객이 알아서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취향과 판단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호불호가 나뉘지만 이번 사태의 핵심은 영화의 잔인함이 아닌 영등위의 역할과 권한의 범위다. 제한상영가 등급 제도는 2008년 7월 헌법재판소가 “기준이 모호하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09년 5월 국회는 제한상영가 기준을 좀더 구체화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현행법상 제한상영가 제도 자체에 문제는 없는 셈이다. 영등위 류종섭 경영혁신부장은 “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보는 상업영화여서 더 엄격하게 잣대를 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계의 입장은 다르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관객의 몫으로 본다면 영등위는 최소한 창작자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성인이 보는 영화’를 뜻하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있음에도 아예 개봉조차 막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매기는 건 권한 남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편집으로 지독함이 지루함 될까 걱정”

특히 다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가뜩이나 자기 검열에 충실한 상업영화가 제한상영가에 발목 잡혀 스스로 가위질을 했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의 제작자 김현우씨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상업영화의 경우, 투자비를 건지려면 영화가 등급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무난한 내용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영등위 등급의 모호한 기준은 영화계에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인 만큼, 이번 논란을 계기로 영화계와 영등위가 함께 고민하고 반성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영등위가 심의위원들 개인의 취향으로 창작물의 작품성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화 개봉을 위해 두 번의 재편집을 거쳐 표현 수위를 조절한 김지운 감독은 “지독한 복수가 지루한 복수가 될까봐 걱정했다”고 영화 개봉 전에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성인’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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