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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21] 주홍색 다이어리

등록 2009-12-16 11:28 수정 2020-05-03 04:25
다이어리. 한겨레 자료

다이어리. 한겨레 자료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이면 지난 1년이 희미하다. 소중했던 만남, 되새겨봐야 할 일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시간을 잃어버린 듯 허탈함이 느껴져 언젠가부터 다이어리에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극장에서 본 영화, 친구의 생일, 누구를 어디서 만나 뭘 했는지 등을 간략하게 적었다. 매일은 아니어도 생각날 때마다 다이어리를 썼다. 낙서 같은 끼적임이 많은 달은 고민이나 약속이 많았고, 메모 없이 깨끗하면 정신없이 바빴던 달이다. 매년 12월이면 그렇게 다이어리를 보며 나의 1년을 평가했다. 이렇게 모인 다이어리가 이제 10개 가까이 된다.

올 한 해는 어땠을까? 주홍색 하드커버 다이어리를 펼쳤다. 올해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모두 22편. 첫 영화는 였다. 지금부터 12월의 마지막 날까지 극장에 가지 않는다면 마지막 영화는 이 된다. 1월1일 설날에는 회사에 출근했다. 빨간 날로 모두가 쉬는 날이었다. 새 부서로의 첫 출근을 앞두고 혼자 나와 시사잡지를 뒤적였다. 5월23일 토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사무실에 나왔더니 정치·사회팀이 모여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검은 별 표시가 있다. 이날엔 특별히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 스티커도 붙어 있다. 6월26일, 사회팀 MT에 끼어 낚시를 갔다. 물가에 가서 매운탕 대신 삼계탕을 끓여 먹었다. 9월엔 한 달 동안 휴직을 했다. 이 달이 가장 분주했던지 검은 글씨가 빼곡하다. 극장 스크린과 TV로 15편의 영화를 봤고, 를 비롯해 7권의 책을 봤다. 친구와 스페인도 다녀오고, 운전도 배웠다. 12월은 각종 송년회 약속이 빼곡하다.

사실 다이어리를 보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사진 대신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살았구나 되새김질해볼 뿐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송구영신 세리머니’로 지난 다이어리를 뒤적이다 보면 어쭙잖은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다이어리는 나의 변화를 읽기에도 적합하다. 20대의 첫 다이어리에는 연애의 설렘과 아픔이 적혀 있다. 용돈을 아껴 쓰느라 가계부도 꼬박꼬박 적었다. 짧은 메모라도 일기처럼 감상을 적었던 다이어리는 30대가 되면서 쓰임이 좀 바뀌었다. 돈을 벌고 씀씀이가 커지면서 가계부는 적지 않게 됐다. 다이어리는 일기장 대신 스케줄러의 역할에 충실해졌다. 친구와 만나 차를 마셨다며 커피잔 스티커를 붙였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나로호 발사 실패, 마이클 잭슨 죽음 같은 사회적 이슈가 내 일상에 들어와 있다.

아, 올해의 다이어리엔 곱게 말린 네잎클로버도 껴 있다. 아침 출근길에 만난 동네 옷수선집 아주머니가 조깅하다 발견했다며 주신 거다. 다이어리 페이지를 넘기다 만나니 그날 아침의 좋은 기분이 생각나는 듯하다. 내년 다이어리엔 또 어떤 추억이 쌓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김미영 기자 blog.hani.co.kr/in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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