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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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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킷 감청’, 제한법으로 면죄부 주기?

기술적 실현 어려운 유명무실 통비법 개정안 제출…
“제한이 아니라 금지의 대상 돼야”
등록 2009-12-17 17:04 수정 2020-05-03 04:25

국정원과 수사기관의 ‘패킷 감청’이 논란이 되면서( 776호 표지이야기 ‘국정원의 신무기, 패킷 감청’ 참조) 이를 제한하기 위한 법안이 나왔다. 하지만 법안에 신설되는 조항 중 일부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데다가 근본적인 대책은 빠져 있어 자칫 패킷 감청에 면죄부를 주는 장치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맨 왼쪽)이 지난 8월31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의 패킷 감청 피해 사례를 고발하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곽동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정책위원(맨 왼쪽)이 지난 8월31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의 패킷 감청 피해 사례를 고발하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이하 문방위) 소속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은 ‘통신비밀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개정안은 크게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넷 감청 허가서에 감청 대상과 범위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는 조항 신설 △감청 기간 1개월로 단축 및 연장 횟수 2차례로 제한(국가안보와 관련된 경우는 감청 기간 2개월에 2개월씩 2차례 연장 가능) △법원의 허가나 대통령의 승인을 얻지 못할 때 관련 자료 폐기 △감청 대상자가 감청 내용의 열람·복사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 신설 등이다.

국정원 국감에서도 기술적 어려움 확인

이 가운데 기술적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은 감청 대상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기재하라는 6조 6항이다. 이 조항은 “인터넷 회선에 대한 감청 허가서에는 전자우편의 내용, 접속한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 인터넷 홈페이지의 게시판 또는 대화방 등에서 게시한 의견, 검색한 정보 목록 등 감청 대상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여 기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의 문제점을 알려면 패킷 감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패킷 감청은 초고속 통신망을 통한 엿보기 수단이다. 전송을 위해 잘게 쪼개진 데이터 조각인 ‘패킷’(packet)을 중간에서 가로채 재구성함으로써, 감시 대상자가 방문한 인터넷 사이트, 검색 결과, 채팅 및 전자우편 내용 등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패킷 상태로 전송되는 데이터 가운데 전자우편 내용 또는 게시판에 올린 의견 등만 따로 걸러 가로채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따라서 개정안 6조 6항이 규정하는 것처럼 감청 대상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특정해 기재하더라도, 해당 데이터를 감청하려면 다른 모든 패킷을 한꺼번에 가로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패킷 감청의 대상과 범위를 제한한다는 애초의 취지는 유명무실해진다.

현재 패킷 감청의 대상을 제한할 수 있는 기술은 MSN 메신저 등 ‘특정 메신저’를 이용한 대화 내용만 골라 수집하거나 ‘특정 사이트’를 통한 전자우편만 골라내는 ‘스니핑툴’이 존재할 뿐이다. 즉 메신저나 사이트를 특정하지 않는 한 데이터의 종류를 판독해 골라내는 기술은 없다는 얘기다.

이는 지난 10월29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비공개 국정감사에서도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국정원 쪽은 “판사들이 (패킷 감청과 관련해) 앞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신경 쓰겠다고 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인터넷 패킷 감청은 특정 IP 주소만 적어내면 웹서핑, 전자우편 등이 한꺼번에 감청되기 때문에 법으로 제한하기에 기술적으로 힘들어 보인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개정안이 오히려 패킷 감청에 면죄부만 주는 꼴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자우편은 이를 관리하는 회사를 통해, 인터넷 게시물 내용은 해당 홈페이지를 통해 사후 확인이 가능한 만큼 실시간 패킷 감청이 필요없다. 패킷 상태에서 감청해야만 하는 경우는 메신저 대화나 P2P 등 기록이 저장되지 않는 일부 경우 뿐이다. 그런데도 개정안은 전자우편이나 인터넷 게시물도 감청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수사 과정에서 패킷 감청에 제한이 없는 셈이다.

증거 채택도 못하는데 감시만 과도해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IP 공유기를 쓰거나 하나의 컴퓨터를 여럿이 함께 쓰는 경우에는 컴퓨터를 사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결국 수집한 패킷을 증거로 채택할 수조차 없는데도 국정원이나 수사기관이 패킷 감청에 나서는 것은 과도한 감시일 뿐”이라며 “패킷 감청은 ‘제한’이 아닌 ‘금지’의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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