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유혹〉. 사진 SBS 제공
어릴 때 엄마 몰래 읽던 책들 가운데 지금도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시드니 셸던의 소설들이다. 그의 소설에는 늘 엄청난 시련을 겪은 뒤 화려하게 변신하고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안 넘어오는 남자는 없었고, 무너뜨릴 수 없는 기업은 없었으며,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납치와 도청, 폭로와 암살 같은 범죄의 짜릿함은 물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싫어하는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들의 대범함이라니. 그러고 보면 엄마가 읽지 못하게 했던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는 숨어서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된 요즘은 그런 얘기를 바로 드라마에서 보여준다. 한국 드라마계의 핵실험 같았던 SBS 을 썼던 김순옥 작가가 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사고를 위장한 살인으로 부모를 잃은 여주인공 주아란(이소연)이 자라 원수의 아들 신현우(한상진)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집안을 파멸시킨다는 설정은 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식물인간이 되었던 현우가 전신 성형을 통해 안재성(배수빈)으로 거듭나 아란을 유혹하며 ‘복수에 대한 복수’를 이룰 예정이라는 점에서 은 가히 헤겔의 정반합 논리만큼이나 고차원적인 세계관을 펼친다.
그래서 ‘강남 최고의 텐프로 로즈마리’였던 과거를 숨긴 채 결혼한 아란은 시누이의 휴대전화를 훔쳐 시아버지의 사업 비리를 제보하고 시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시어머니에게 남자의 이름이 적힌 소포를 전달하며 온 가족이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전국 ‘시’자 들어가는 가족들이 보면 입을 모아 “사람 하나 잘못 들이면 집안 망친다더니, 쯧쯧…”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뿐 아니다. 눈만 마주치면 열띤 키스를 퍼붓는 정부와의 밀회를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깨진 와인잔 위로 올라서기도 하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의식이 돌아왔는지 확인하려고 피부에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한다. 병원과 기업, 경찰의 체계를 깡그리 무시하고 벌이는 아란의 음모는 거대하지만 후처리가 영 어설프다.
그러나 에서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복수의 방식이 아니라 그 근원이다. 아란의 부모는 사장인 신우섭(한진희)의 비리를 캐다가 살해당했고, 신우섭은 “대충 사고사로 처리하”라며 이들의 죽음을 묻어버린다. 신우섭의 돈과 권력에 밀려 법이나 공권력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던 아란이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결국 사적인 방식의 복수뿐이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아닌 현실 속에서 해소되지 않고 쌓여가는 개인들의 억울함은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떻게 표출될까. 민간인 학살, 사법살인, 직업병에 대한 미보상 등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사라져버린 수많은 사건들이 머지않아 이 나라를 ‘복수의 왕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물론 복수의 용의선상에 오를 이들이 신우섭처럼 “지 명줄이 그거밖에 안 되는 걸 누구한테 원망해?”라고 반문한다면 미리부터 걱정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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