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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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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찾아온 ‘허진호식 사랑법’

구체적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감정의 흐름 충실하게 보여주는 그의 패턴에 충실한 <호우시절>
등록 2009-09-29 18:21 수정 2020-05-03 04:25
영화 〈호우시절〉

영화 〈호우시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박인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처음 들었을 때 궁금했다. 눈동자와 입술이 가슴에 있다면서 어떻게 ‘이름’을 잊을 수가 있을까? 왜 옛날은 가도 사랑은 남는 게 아니라,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고 거꾸로 말하는 걸까? 사랑은 불변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이어서, 그것이 기억되는 방식도 언어가 아닌 ‘몸의 기억’이라는 것을 어린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절대불변의 이상(理想)으로 보는 것. 둘째, 시공간적 구체성을 지닌 감각 현상으로 보는 것. 전자의 ‘형이상학적 사랑관’을 설파하고 있는 사람이 박진표 감독이요, 후자의 ‘현상학적 사랑관’을 설파하고 있는 사람이 허진호 감독이다.

박진표의 형이상학적 사랑, 허진호의 현상학적 사랑

‘형이상학적 사랑관’을 지닌 박진표 감독의 영화 ( )의 인물들은 극단적 상황에서도 마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듯 사랑하고 결코 되돌아보는 법이 없다. (의 하지원의 대사 “사랑은 불살라버리는 거야.”) 순애보(純愛譜)라기보다는 순애보(殉愛譜)에 가까운 그의 영화에서 시공간적 배경이나 주인공의 감성 등은 중요치 않다. 그들의 절대적 사랑을 ‘시험’할 (그러나 극복될) 제약들이 중요하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차곡차곡 장면을 쌓아 설득하거나 도출할 결론이 아니라 ‘전제’이다. 결론은 (모든 근본주의가 그러하듯이) 급진적 실천이다. 사실 그의 영화는 시청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영화라는 매체보다는 전설, 순교담, 고전소설 등 구전문학에 가까운데, 영화라는 장르가 활용되는 이유는 ‘전파성’과 ‘충격성’ 때문이다. (의 대표적인 장면은 앙상한 김명민의 나신을 전시한 장면이다.) 즉, 그의 영화는 이념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선동영화’인데, 그 이념이 ‘절대사랑’이다. (멜로가 아니었던 역시 ‘선동영화’이다.) 물론 여기에는 ‘숭고함’이나 ‘잃어버린 대의’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선한 눈물로 가슴을 정화케 한다.

‘현상학적 사랑관’을 지닌 허진호의 영화는 반대이다. 시공간적 감각이 중요하다. 언제나 구체적인 계절이 명시된다. 눈, 벚꽃, 비 등 계절을 상징하는 풍경은 물론 공기나 먼지까지 중요하다. 장소도 구체적이다. 지방 소도시 사진관 앞 도로, 강릉의 쏴~ 소리를 내는 대숲, 작은 기도원과 산골 빈집, 그리고 고즈넉한 두보(杜甫)초당까지. 그들이 만나는 고졸한 장소들이 눈에 선하다. 이들이 무엇을 먹는지도 중요하다. 아이스크림, 라면, 돼지내장탕면 등등. 그래서 그의 영화는 관객에게 마치 자신의 경험 같은 공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그의 영화적 특징은 시청각적 감각을 재료로 삼는 영화라는 매체에 잘 맞아떨어지며 세련되고 예술적이다.

허진호 영화의 ‘현상학적 사랑관’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특징은 인물의 주관적 상황과 감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들 각자의 상황과 경험이 중요하다. 의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여자에겐 그것이 발설되지 않으며 사랑은 맺어지지 않는다. 의 여자는 이혼 경험이 있고, 사랑의 상처가 없는 남자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의 두 남녀는 ‘배신당함’이라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하지만, 여자의 남편은 죽고 남자의 아내는 깨어남으로써 어긋난다. 그러나 남자가 아내로부터 심리적으로 놓여남으로써 둘은 함께 길을 떠난다. 에서 불치병의 남녀는 사랑할 수 있지만, 남자의 병이 낫자 갈라서고, 남자는 병이 재발하면서 그녀와 사랑을 뉘우친다.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경험할 수 없으며,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네가 나인 것처럼 느껴지는’(의 조승우의 대사) ‘빙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박진표 감독 영화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각자의 상황과 정서적 차이가 허진호 감독 영화에선 결정적 제약이 된다.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언어로 이해되는 관념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의 누가, 어떤 경험을 지닌 누구와 나누는 감정인가에 따라 구체적인 묘사가 뒤따라야 하는 현상이다. 사랑은 각자의 상황과 정서의 추이에 따라 봄눈이 녹거나, 벚꽃이 지듯 사라진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 피었다 스러지는 찰나적 감각이고, 아름답지만 덧없는 그 감흥이 내 의식이 아닌 ‘몸의 기억’으로 남아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그래서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

은 허진호 감독의 사랑관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영화다. 쓰촨 지진 1주년인 5월, 청두의 두보초당에서 메이(May·가오위안위안)와 동하(冬夏·정우성)가 영어로 인사한다. 미국에서 시문학을 공부했던 둘은 서로 사랑을 느꼈으나, 본격적인 연애에 돌입하기 전 헤어졌다. 그들은 각자 다르게 기억하는 추억의 자투리를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교환한다. 사랑은 불변이라 언제 어디서 새로 만나도 늘 같은 감정이라 믿는다면, 서로를 알아봄과 동시에 예전 감정 그대로 몰입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졌고, 무엇보다 주체가 변했다. 바뀐 주체의 의식은 서로 다른 회상을 한다. 그리고 서로를 원하지만 주저한다.

보편적 관념 아닌 구체적 상황 속의 사랑

영어로 번역되어 미처 소통되지 못한 모국어적 감성은 두 개의 ‘잉여’를 사이에 두고 회전한다. 돼지내장탕면과 지사장님. 그녀는 돼지내장탕면을 잘 먹는 남자를 좋아한다 말하나 동하는 먹지 못한다. 동하와는 한국어로, 메이와는 중국어로 대화하는 지사장님은 (‘사랑에는 국경이 있습디다’라고 말하는) 그 자체 국경이자 접점을 형상화한다. 여기서 국경이란 지정학적 경계만이 아니라, 주체들 사이의 허다한 경계를 가리킨다. 둘 사이의 경계는 문화적 이질성보다 경험의 낙차이다. 메이는 돼지내장탕면을 잘 먹는 중국 남자와 결혼했었고 쓰촨 지진에서 그를 잃었다. 과거는 현재에 중첩돼 있다. 동하가 중국어로 메이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자 ‘보고 싶었다’가 맞는다고 고쳐준다. 그런데 왜 그녀는 동하에게 (시제가 엄격한) 영어로 ‘결혼했었어’가 아니라 ‘결혼했어’라고 말했을까? 그녀의 마음과 지갑 속에 아직 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분명한 의식의 기억과 자주 혼동되는 언어와 달리, ‘몸의 기억’은 훨씬 명확하다. 자동차 사고에 대한 그녀의 몸의 반응은 ‘기절’로 나타난다. 남편의 영정에 돼지내장탕면을 바치며 그를 떠나보낸 뒤, 그녀는 동하가 보내준 자전거를 탈/수/있/다. 동하를 만났던 그녀, 동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주체로 그녀의 ‘몸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제 그녀도 그의 눈동자와 입술이 그녀의 가슴에 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봄비에 젖듯 사랑에 젖을 것이다. 10월 8일 개봉.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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