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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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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자극하지만 다소 어정쩡한

다섯 편의 단편 모은 영화 <오감도>…
우리시대 사랑법의 단면은 좀 읽히지만 확실히 남는 뭔가는 부족해
등록 2009-07-10 16:21 수정 2020-05-03 04:25

한편 한편의 주제를 복기해보면 상당히 ‘급진적’ 영화가 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는데,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날카로운 시선도, 짜릿한 쾌감도, 야하단 느낌도 또렷이 남지 않는다. ‘에로스’를 주제로 만든 5편의 단편을 옴니버스로 묶은 영화 는 그런 아쉬움을 남긴다. 그래도 한편 한편의 퍼즐을 맞추어보면 우리 시대의 사랑법, 단면이 조금은 읽힌다.

‘his conscern’

‘his conscern’

엔 처음 만난 남녀, 죽음으로 헤어지는 부부, 신인 배우와 천재 감독, 뒤통수를 때리는 삼각관계, 그리고 ‘무려’ 고교생 세 쌍의 스와핑까지 에로스의 다양한 측면을 반영하는 관계가 나온다. 멜로·코미디·판타지·로맨스의 다양한 외피를 두른 단편들은 때로는 서로를 잇고 때로는 단절을 짓는다. 5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16명, 중견부터 신인까지 제각각 이름과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다.

사랑을 나누는 다양한 관계들 나열

먼저 변혁 감독의 ‘his conscern’(사진). 유혹의 고전적 소재인, 첫눈에 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다룬다. 부산행 KTX에서 만난 앞 자리의 ‘선녀’ 한지원(차현정)에게 마음을 뺏긴 ‘선남’ 정민수(장혁)는 무작정 지원을 따라 내린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얻고 망설이다 결국엔 연락한단 이야기.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할 것인가, 확신이 없는 가운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망설이고 유혹하는 과정이 민수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해진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낯선 사람 사이의 섹스를 여전히 불편해하는 한국 사회의 심기를 건드리는 결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이 이뤄지는 경우가 장혁 같은 조각미남이 아니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애로점’도 있다. 그래도 민수의 심리묘사를 통해서 웃음이 순간순간 터지는 장면이 적지 않다.

허진호 감독은 여전히 아픈 사랑 얘기를 다룬다. 그의 ‘나, 여기 있어요’는 집 안에서 숨박꼭질을 하는 부부로 시작한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김강우)은 “혜림아 어디 있니?” 하면서 부인을 찾는다. 이것은 단순한 하루의 얘기가 아니다. 몸이 아픈 탓에 남편과 ‘에로스’를 완성하지 못하는 부인은 결국 병으로 숨진다. 등의 장편에서 병에 걸린 이들의 사랑에 끈질기게 매달려온 허 감독은 ‘에로스’를 다루는 단편에서도 이렇게 비슷한 주제를 변주한다. 그의 작품은 기억, 특히 냄새의 기억으로 남는 에로스를 다룬다. 남편이 숨진 아내의 옷에 남은 온기로 사랑을 추억하는 장면은 애틋하지만, 굳이 에로스를 주제로 한 에 이 작품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별달리 보이지 않는다.

에로스가 금기의 바깥으로 나아갈 때에 체온이 오른다면, 유영식 감독의 ‘33번째 남자’와 민규동 감독의 ‘끝과 시작’은 일단 소재가 뜨거운 영화다.

‘33번째 남자’의 신인 여배우 김미진(김민선)은 말수가 적은 봉찬운(김수로) 감독을 만나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한 장면에 33번째 테이크까지 가면서 고생하는 김미진을 옆에서 지켜보는 노련한 여배우 박화란(배종옥)은 미진에게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갑자기 미진은 능숙한 배우로 거듭나고 감독과의 관계도 바뀐다. ‘33번째 남자’는 유영식 감독의 말처럼 “현실과 비현실, 코미디와 드라마, 이성과 동성, 부리는 자와 종사하는 자”가 뒤섞인,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만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 하는 주제를 다룬 영화에서 흔히 동원되는 코드에 기대는 결말은 의외성이 부족하다.

금기의 바깥으로 나가기 두려워한 듯

‘끝과 시작’도 한 남자, 두 여자의 삼각관계 이야기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통해서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다. 교통사고로 숨질 당시에 남편은 아내의 후배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과 시작’은 남편이 숨진 끝에서 시작된다. 한사코 후배는 아내의 집에 들어와 살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 관계엔 반전이 숨어 있다. 역시 옴니버스 영화였던 에서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단편 ‘소년, 소녀를 만나다’에서 연인으로 나왔던 엄정화와 황정민이 이번엔 부부로 출연한다. 여기에 종잡을 수 없는 여인 ‘나루’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 김효진의 호연이 어우러진다.

오기환 감독의 ‘순간을 믿어요’는 고교생 세 쌍의 스와핑을 다루는 파격적인 소재지만, 결국엔 스와핑을 통해서 원래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결말이 너무나 정석에 가깝다. 스와핑 이후에 달라진 변화도 그다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못한다.

이렇게 의 단편들은 어정쩡한 위치에 머무른다. 에로스를 자극하되 금기의 바깥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여전히 에로스를 내세운 한국의 상업영화가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인 것 같다. 그래도 상반신을 노출하며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배종옥 등 배우들의 연기가 곳곳에서 빛난다. 그리고 배종옥과 김민선, 엄정화와 김효진의 동성 간 키스신이 관객의 오감을 낯설게 자극한다. 이제 동성애 코드는 한국에서도 에로스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노출의 강도가 아니라 이야기의 방식이다. 7월9일 개봉.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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