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가 마주 본다. 둘은 옛 연인. 전면 유리창에 역광으로 비추는 실루엣 화면. 여자는 남자를 오해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의 오해를 푼다. 둘은 끊어질 듯한 사랑을 이어가는 것일까. 여자는 남자에게 “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면 그만두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한다. 남자는 “너와 나는 이제 완전 남남이고 이 계획은 전혀 너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남자는 진심을 숨기고 여자를 속이려는 것일까. 진실은 남자의 말에 가깝다. 남자 말 그대로 여자는 이 계획에 별다른 변수가 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주인공인데, ‘단 하나의 사랑’이라는 불변의 법칙이 작동하는 게 ‘드라마’인데, 둘의 관계를 아쉬워하는 슬픈 음악도 깔리지 않는다. 사랑은 이 드라마에서 조금 ‘하찮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남자이야기’다.
(송지나 극본, 윤성식 연출, 지엔트로픽쳐스·필름북 제작, 한국방송 월·화 밤 9시50분 방송)는 2009년 드라마 지형도에서 변종처럼 보인다. 시청에서 연애하거나(), 스타와의 연애를 리바이벌하거나(), 를 리메이크()하면서 ‘안전한 주제’ 뒤에 숨어버리는 드라마들 틈에서 말이다. 드라마도 비지니스맨의 것이 된 걸까. 요즘 드라마의 설정은 호기심을 동하게 하고, 캐스팅도 화려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 드라마 줄거리는 키 큰 사람 징검다리 건너듯 덤벙덤벙 허술하다. 밀지 않아도 물에 빠져버릴 것 같다.
사건의 연쇄에 포위된 남자반면 는 한발 한발 신중하게 건넌다. 의 월요일분에서는 줄거리를 설명하는 데 5분 넘게 할애한다. 다른 드라마가 이전 회의 끝부분을 다시 보여주는 것과 다르다. 복잡한 구성 때문이다. 드라마는 한 회 건너뛴 불성실한 시청자는 인내하지 않는 고집쟁이다. 시청률도 높지 않다. 5월5일 10회 시청률이 7.4%(TNS미디어코리아)다.
는 한 남자의 복수극이다. 이 복수극 내에 ‘대한민국’을 짜넣었다. 기획의도에서부터 확실하게 드러난다. 송지나 작가는 (1991), (1995)에 이은 ‘대한민국 3부작’의 마지막 편이라고 말했다. 이전 2부작은 ‘역사’가 원작이다. 1부 (물론 소설 원작이 있다)에는 일제시대-해방-6·25가 등장하고, 는 광주항쟁-삼청교육대를 다룬다. 의 원작은 ‘사회’다. 역사 교과서의 사건 대신 신문에 나온 사건들이다. ‘쓰레기 만두 파동’ 때 관련 업체 사장이 자살한 신문의 단신은 김신(박용하)이 복수에 나서는 중요한 사건이 되고, 인터넷으로 네티즌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결국 정부가 감옥에 보내는 ‘마징가 헌터’(박기웅)는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다(무죄판결 전 드라마가 집필됐다). 경영 실적 대신 주가의 등락으로 바뀌는 회사의 자산가치와 대박을 노린 주가조작은 신문 경제면이 연상된다. 단어만으로 아우라가 생겨나는,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도 드라마 곳곳에서 분기점을 만든다. ‘사채’ 빚에 팔려가는 경아(박시연)는 ‘텐프로’로 들어가고, 연쇄살인범을 분석하던 신조어 ‘사이코패스’도 한 인물(채도우 역·김강우)을 구성한다.
는 주인공의 행로에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배치했다. 억지스러운 매칭도 있다. 순박한 여성 여옥(채시라)은 군대위안부였다가 스파이로 자리를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대치(최재성)가 제주도로 가면 반란이 일어나는 식이다. 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물은 주체적으로 배치된다기보다는 사건의 연쇄에 포위된다. 인물이 좌절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이다. 이윤의 연쇄 구조가 김신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연쇄를 만들어낸다.
놀라운 순간은 가장 마지막에?복수하는 남자(김신)와 원수 진 남자(채도우)의 대립은 ‘계급투쟁’다. “돈 같은 건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라”는 쪽과 “돈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누구나 돈을 벌면 서민은 왜 있겠어. 서민, 일반 백성, 떨거지들”이라고 말하는 쪽은 사는 세상이 다르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있어. 나는 니가 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어”라는 여자(박시연)는 영악하다.
는 참조하는 영화도 많다. 김세영 원작의 , 영화 으로 이어지는 잘 짜인 ‘합’이 주는 쾌감(주인공 박용하는 영화 의 캐릭터 그대로 등장한다.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 역시 영화와 많은 부분 비슷하다), 연애 이야기에 올인하지 않더라도 긴박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의 교훈, 그리고 한국방송 드라마 과 등 복수극 ‘누아르’의 세련됨이 유입됐다.
각각의 요소들은 점묘법을 구성한다. 정반합의 변증법과는 다른 정정합의 인상파 그림. 이 원재료들이 뚜렷한 목적 아래 점묘된다면, 눈을 들어 전체를 본 순간 놀라운 모자이크가 만들어질 것이다. 시간의 예술인 드라마에서 놀라운 순간은 뒤로 점점 미뤄진다. 는 몇 번의 놀라운 순간을 보여주었다. 절반을 달린 10회에서 중간 결절점을 이루며 잦아들었다. 치밀하게 쌓아올린 복수는 일단 상대의 만만찮음을 드러내면서 실패로 끝났다.
다시 새로운 복수가 준비된다. 10회에서는 김신과 채도우의 새로운 전장이 재개발 구역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다시 한번 용산 등 재개발 지역의 문제와 개인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도시라는 ‘사회’를 참조한다. 힘없는 민선 시장과 거대 건설사와 야합한 공권력(경찰 권력)도 등장한다. 신자유주의의 속성과 파괴된 개인이 오묘하게 맞물린 복수 전반부에 비해 이 현장은 ‘고전적’이고 ‘전형적’이다. 고석만·김기팔의 (1991)이나 노희경의 (1997)의 구도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기대치를 높여놓은 의 숙명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거대한 결말을 볼 수 있기를.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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