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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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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별희’의 그 사람이 여기에

최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서 성공한 중국 배우에 관한 영화 <매란방>
등록 2009-04-01 16:59 수정 2020-05-03 04:25

천카이거 감독이 경극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의 아우라를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경극대왕’이라 불렸던 배우에 대한 영화라면 더욱 에서 장궈룽(장국영)이 연기한 데이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천카이거 감독의 신작 은 데이의 모델이 되었던 배우 매란방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장궈룽은 없으므로 리밍(여명)이 매란방을 연기한다.

맹소동과 매란방은 경극을 통해 서로에게 점점 다가간다.

맹소동과 매란방은 경극을 통해 서로에게 점점 다가간다.

리밍 보면 자꾸 떠오르는 장궈룽

은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매란방이 스승을 극복하고 경극의 새 시대를 여는 초반부다. 여기선 서양과 동양의 가치가 충돌한다. 전통을 고집하는 스승에 맞서 젊은 매란방은 정적인 경극에 동적인 서양 연극의 요소를 가미하는 형식 파괴를 시도한다. 이런 실험엔 서양 연극을 전공한 구여백(쑨훙레이)이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구여백은 매란방 예술 인생의 동반자가 된다. 1894년 경극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매란방은 이렇게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경극배우가 되었다. 그렇다고 매란방이 중국의 전통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애제자 매란방과의 갈등으로 스승은 숨을 거두지만 그가 남긴 유언은 매란방 인생의 지침이 된다. 결국 천카이거 감독이 을 통해 말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에 기초한 현대화’로 보인다. 스승의 꼿꼿한 예술적 태도를 버리지 않되 서양의 기교적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제는 경극대왕이 된 매란방의 시대이자 서양으로 진출하는 이야기다. 매란방은 미국에서 경극을 공연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예술가로 절정에 오른 매란방의 인생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예술이냐, 사랑이냐, 고전적인 갈등이다. 기혼인 매란방은 경극배우 맹소동(장쯔이)을 만나 평생 처음 사랑을 느낀다. 여장배우인 매란방과 남장배우인 맹소동의 만남은 무대와 현실이 충돌하고, 성별이 뒤바뀌는 사랑이다. 현실에서 남성은 무대에서 여성이 되고, 현실의 여성은 무대의 남성이 되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인 관계다.

이렇게 뒤엉킨 이들의 사랑은 현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매란방의 예술적 파트너인 구여백은 이제 사랑의 방해자가 된다. 그는 매란방의 미국 무대 진출을 위해, 맹소동에게 떠날 것을 종용한다. 아무도 달래주지 못하는 외로움이 없다면, 매란방의 탁월한 예술도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란방의 아내 복지팡(천훙)은 맹소동에게 말한다. “그이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존재야. 관객에게 속해 있으니까.” 그렇게 매란방 안에서 경극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대립한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중국 배우 최초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선 매란방은 큰 성공을 거둔다.

영화엔 애국주의, 현실엔 중화주의

그리고 매란방이 예술가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경극대왕 매란방의 상징성을 활용하려 애쓴다. 중국 전통의 상징인 매란방을 굴복시키면 중국을 굴복시키는 것이 된다는 논리다. 이제 무대를 넘어선 매란방의 투쟁이 시작된다. 경극배우의 지위를 높이고 예술가의 명예를 지키려고 애썼던 스승의 흔적이 그의 정신적 바탕이 되지만, 중국인의 자존심을 지킨다는 메시지가 뚜렷한 후반부에서 애국주의 그림자를 지우긴 어렵다. 영화에선 중국이 침략당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중화주의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을 둘러싼 의 얘기가 그다지 새롭지 않고, 리밍의 연기를 보면서 자꾸만 장궈룽을 떠올리게 된다. 은 4월9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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