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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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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경방은 지금 진화 중

미네르바 구속 이후 글쓰기 활동 위축… 2세대 경방 고수 중심 집단지성화
등록 2009-03-19 14:24 수정 2020-05-02 19:25
인터넷에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아무개씨가 1월10일 저녁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인터넷에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아무개씨가 1월10일 저녁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소설…. 알지? 내 글은 대충 보고 한번 웃고 그냥 잊어. 오늘은 자료 정리 좀 했어. 혼자 보기 아까우니 같이 보자고….

(추신) 이글은 소설입니다. 명예훼손에 대한 의도는 물론 없고요.”

최근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경제토론방(경방)에 올라온 글이다. 대표적인 경방 논객 2명이 썼다. 두 논객은 각각 문패와 꼬리표를 달았다. 한 논객은 글 들머리에 ‘이 글은 소설이니 그냥 대충 보고 웃어버리라’는 얘기를 써놓는다. 또 다른 논객은 글 마지막 부분에 ‘명예훼손 의도가 없다’는 꼬리표를 달았다.

미네르바 구속 뒤 경방에 나타난 한 현상이다. 어떤 누리꾼은 미네르바 구속 뒤 경방 글들이 자기 검열에 빠졌다고 말한다. 또 다른 누리꾼은 반대되는 얘기를 내놓는다. 오히려 정부와 검찰에 대한 일종의 항의 또는 조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블로그에 은둔하거나 다른 사이트로 이사

경방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네르바는 1월10일 표현의 자유와 인터넷 탄압 논란에도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구속됐다.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유포된 허위 사실’이라는 게 검찰의 구속 근거였다. 미네르바 구속 두 달 뒤 경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코스믹에그·스파르타·리어왕·바그다드카페·공돌이·카오스·닥터케이·조커·닥터윤 등 논객 10여 명이 절필했다. 코스믹에그는 미네르바가 구속된 날 “여러분이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은 그런 세상입니다. 자세한 것은 더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힘들더라도 부디 이겨내시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세요”라는 글을 남긴 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다.

지난해 ‘짱’이라는 필명을 쓰는 한 누리꾼이 만든 ‘경방을 빛낸 100명의 고수들’이란 제목의 게시물(아래)이 인기를 끌었다. 이라는 노래를 패러디한 것인데, 코스믹에그에게는 ‘거시적인 밑그림’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졌다.

경방을 빛낸 100명의 고수들

경방을 빛낸 100명의 고수들

‘다음아고라미네르바글모음’ 카페 운영자인 ‘일심’은 “미네르바 구속 뒤 한 달 동안 큰 혼란을 빚었다. 논객들이 게시물을 삭제하고 블로그도 비공개로 바꿔놓은 채 종적을 감추기도 했다. 한 달쯤 지나서야 분위기가 다소 차분해졌다”고 말했다. 그 한 달 동안 논객들이 미네르바 구속에 대한 분노와 구속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던 셈이다.

은 경방 논객 5명에게 ‘미네르바 이후’를 묻는 전자우편을 보냈다. 하지만 일부 논객들은 전화를 걸어오거나 답신을 통해 공개적으로 나서기 어렵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검찰을 동원해 미네르바 구속이라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얻은 효과인 셈이다.

전자우편을 보낸 한 논객에게서 답장을 받았다. 그는 “전화가 도청되기 때문에 (전화를 걸지 않고) 메일을 보낸다”고 했다. 마치 1980년대 도청 때문에 대학교 동아리방에서 전화를 걸지 못했던 때와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미네르바 구속 뒤 번성했던 아고라는 그 명성을 다시 찾지 못하고 있다”며 “논객은 셋으로 갈라져 나갔는데, 카페나 블로그에만 머무는 유형과 진보뉴스 사이트로 옮긴 유형, 이곳저곳에 글을 올리는 유형 등이다”라고 소개했다.

경방에 올라온 글에도 예전과 차이가 느껴진다. 정부를 상대로 한 직접적이고 과감한 글쓰기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가벼운 글들(일부러 가볍게 했을 수도 있다)은 여럿 등장하지만, 무게를 싣고 정부에 칼끝을 대는 글은 일제히 사라졌다.

한 경방 논객은 “간혹 글을 쓰고 난 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진 삭제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논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위치를 숨기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추적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논객들도 있다. 나부터도 글을 쓴 뒤 몇 번에 걸쳐 수정 작업을 하곤 한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삭제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최근 아고라에선 무게와 비중이 있는 논객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 미네르바 구속 뒤 경제 흐름을 잡아나가지 못하는 것 같다. 경제 전망에 대한 논쟁도 사라졌다. 논객들이 근거 있고 공격적인 글쓰기를 회피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아고라에서 글쓰기를 하는 논객들이 대부분 개인 신분이다. 단체나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일심’도 “최근 아고라에 올라온 글을 보면 정치적인 얘기가 최대한 빠져버렸다. 아무래도 검찰이 허위 사실 유포라는 칼날을 들이대니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는 금융·외환 문제가 최대 이슈였다. 경방에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논객들이 자기 나름의 날카로운 분석과 전망으로 누리꾼의 답답함을 풀어줬다. 그래서 경방에서 뜬 논객들은 대부분 금융 스타들이었다. 최근 화두는 일자리다. 그렇지만 경방에는 일자리나 고용 이슈에 대한 얘기들이 많지 않다. 특히 청년 고용 문제는 현실 경제에서 심각하지만 경방에서는 논쟁이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물론 미네르바가 키워놓은 소통의 토양은 여전했다. ‘다음아고라미네르바글모음’ 카페는 지난해 8월 말까지 회원 수가 300명도 채 안 됐으나 9월부터 미네르바가 뜨면서 하루에 2천~3천 명씩 회원 가입이 이어졌다. 미네르바가 구속되기 전 회원 수가 8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8만7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이 카페를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5천 명 정도다. 카페 운영자인 ‘일심’은 “앞으로 이 카페를 경제 포털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상승미소·나선·양원석·케네디언 등 스타 논객들에 이어 최근에는 세일러·루슬란_K 등 새로운 스타도 탄생하고 있다. 또 아고라의 글들이 책으로 속속 나오고 있다. SDE의 , 나선·상승미소의 등이다. 이 밖에 몇몇 경방 논객들이 책을 준비 중이다. 과거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책들은 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젠 경방 논객들이 경제 분석서를 펴내면서 오프라인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오프라인 학자들이 소통 나서야”

앞으로 경방에 미네르바를 대신할 ‘초인’이 ‘재림’할까? 전망은 엇갈린다.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경제학)는 “인터넷 공간은 정보시장에서 완전경쟁 시장이다. 얘기가 안 되는 글은 네티즌에게 외면당한다. 미네르바가 구속됐지만, 지금 경방에는 그에 못지않은 글들이 올라온다. 베스트에 올라오는 글들은 질적으로 우수하다. 아고라 경방은 여전히 집단지성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관적인 쪽도 만만찮다. 한나라당이 이른바 ‘MB 악법’으로 불리는 사이버 모욕죄 신설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소통을 묶어버리는 재갈의 조이기는 더할 것으로 누리꾼들은 우려하고 있다. 일부 논객은 아예 외국에 서버를 둔 사이트로 ‘사이버 망명’을 떠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기자에게 전자우편을 보내온 한 경방 논객은 “아고라의 대안으로 이미 몇몇 논객들은 다른 서버로의 이동을 심각하게 고려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한토마 등 진보언론 사이트는 아고라 경방에 비해 규모나 영향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진보언론 사이트가 권력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할 경우 그쪽으로 많은 논객들이 옮겨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방이 활기찬 토론의 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김병권 센터장은 “오프라인 학자들이 아카데미즘을 버리고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춘 글쓰기를 해야 한다. 또 온라인 카페나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의견을 걸러 이슈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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