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안젤름 키퍼전, 줄리언 슈나벨전 등 현대미술의 지평을 개척한 대가들의 전시회</font>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오직 절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독일 미학자 아도르노(1903~69)가 2차 대전 뒤 인간의 주체성 상실을 개탄하며 남긴 이 경구는 전후 현대미술의 역사를 푸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두 차례의 세계전쟁은 막대한 정신적 후유증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존 예술사조들을 모조리 갈아엎고 새 출발 하는 터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후세대 거장의 ‘이상한 집’
인간의 이성이 자행한 전란의 대학살과 파괴의 참상을 감당할 길 없던 미술가들은 정치적 광기에 오염된 사실적 구상회화(형상이 있는 그림)를 팽개쳤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 의식 내면을 표현한 추상 그림에 심취한다. 화면에 마구 물감을 뿌리거나 들이붓는 추상 표현주의, 터질 듯한 색채의 팽창을 드러낸 앵포르멜, 희거나 검은 색면에 단순한 선을 걸치는 미니멀리즘까지, 추상은 30년 이상 득세했다. 하지만 대중소비 시대로 접어들어 역사와 현실을 반성하려는 작가들에게서 이미지 넘치는 현실을 옮기려는 본능이 70~80년대에 다시 불거져나온다. 대중광고에서 예술적 영감을 길어올린 팝아트에 이어 음울한 화면 속에 인간과 자연의 단면을 담은 독일의 신표현주의, 뉴페인팅 등이 등장했다. 그 언저리에서는 털, 섬유 같은 일상 재료로 죽음과 삶, 억압을 이야기하는 여성주의 예술이 또 다른 가지를 치고 나타났다.
지금 미술동네의 봄을 수놓고 있는 서구 거장들의 전시회는 공교롭게도 현대미술의 이런 변화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 적지 않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의 안젤름 키퍼전(5월24일까지, 02-733-8449), 사간동 갤러리 현대의 줄리언 슈나벨전(4월20일까지, 02-743-6111~3),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아네트 메사제전(6월15일까지, 02-2188-6232)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60년대 이후 서구 미술사에서 소재의 영역, 표현 방식 등을 혁신하면서 현대미술의 지평을 개척한 대가들이다.
독일 전후세대의 거장인 키퍼는 음울하지만 장대한 풍경의 파노라마로 문명과 현실을 이야기한다. 국제갤러리의 근작전 ‘양치식물의 비밀’에서 그는 우주와 자연, 인간을 잇는 신비스런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있다. 신관 1층 전시장에는 키퍼가 만든 두 개의 ‘이상한 집’이 들머리에 덜컥 내려앉았다. 볼록볼록 징그러운 돌기가 흘러내리는 허연 스티로폼 벽, 벽 사이 틈으로 드러난 녹슨 철근 뼈대, 녹슨 함석판으로 막힌 출입문. 지붕도 없는 이 집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관객의 키를 넘는 집 모양 구조물은 낡고 답답한 느낌으로 눈을 조여온다. 들어갈 수 없는 방을 왜 들여왔을까. 다른 쪽 벽면은 고사리나 풀 등의 식물들을 황토흙과 물감을 짓이긴 화폭에 눌러붙인 20개 패널 작품들이 거대한 병풍처럼 시선을 압도한다. 세사를 초월한 자연의 장대함과 덧없는 인간의 구조물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다.
2층에는 어둑한 하늘에 점묘처럼 흩뿌린 흰점으로 별자리를 그리거나, 막막한 광야를 배경으로 가시덩굴이 엉킨 풍경, 갈라진 흙땅 위에 널브러진 해바라기와 씨앗 등의 평면 작업 등을 내보이고 있다. 나뭇가지에 열매처럼 납으로 만든 옷을 걸어놓고 수형자 번호를 적은 작품도 보인다. 키퍼는 2차 대전의 상처,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등 독일의 어두운 역사를 납, 꽃, 재, 헝겊, 지푸라기, 사진 등이 덧붙여진 회화, 조각, 설치작품 등을 통해 표현해왔다. 전시는 현실 묘사를 넘어 종교와 신화, 인간, 우주의 관계 등 근원적 문제로 더욱 시야를 확장하는 거장의 최근 흐름을 드러낸다. 장대하면서도 폐쇄적이며, 뜨겁고도 쿨한 수수께끼 같은 정서들로 충만한 키퍼의 근작들은 여느 전시와 다른 시각적 후련함이 압권이다.
깨진 접시 조각을 붙여 만든 초상화
근처의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아시아 순회전을 차린 슈나벨은 깨진 접시 조각을 붙여 사람들의 초상이나 고대 그림들을 재현하는 색다른 재료 그림으로 80년대 초 스타 반열에 오른 작가다. 지난해 영화 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는 등 영화감독으로도 이름을 얻었다. 물감을 마구 흩뿌려 사진 속에 추상 이미지를 심거나 방수천, 사포 등 낯선 재료들을 동원하면서 자신의 주변 풍경이나 세계, 자신에 대한 일상적 느낌들을 표현한 작품들이 내걸렸다. 자기 아내 등 주변 인물을 그린 초상 등이 보이는데, 접시 조각 위에 그리거나 거칠게 그린 뒤 왁스와 투명수지 레진을 들이부어 느끼한 감흥을 유발한다. “일상의 진실이 허구보다 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그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며 총체적인 진실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일관되지 않고 산만한 그림 속 추상 구상 이미지들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 두 아티스트가 거장이 된 이유는 현대미술판에 죽었다던 구상그림의 자리를 다시 세운 데 있다. 하지만 같은 신구상파더라도, 이들은 엄연히 작업의 맥락이 다르다. 슈나벨은 70년대 이후 소비문화의 풍요로 이미지와 언어가 혼란스럽게 넘쳐나는 미국 시각문화의 현실을 은유한다. 혼잡한 이미지 세상에서 나만이 느낀 것을 나름의 다양한 재료와 그림 방식으로 뽑아내는데, 굳이 추상이나 구상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슈나벨 회화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가볍고, 알맹이 없는 그림꾼이란 비아냥을 평단에서 듣기도 한다.
아네트 메사제, 소녀와 마녀의 감성 사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프랑스 거장 아네트 메사제는 여성의 섬세한 눈으로 색다른 표현 재료와 매체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공을 세웠다. 털, 섬유, 봉제인형, 박제된 새 같은 가볍고 하찮은 일상 물질, 사물들을 즐겨 활용하는 설치작업들은 가냘프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히스테릭한 여성의 섬뜩한 결기가 배어나온다. 땅 위에 붉은 실크천을 덮어 바람에 일렁거리게 한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작 는 땅이 피를 토하는 듯한 잔혹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박제된 새들에게 옷을 입혀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은 이나 기괴한 봉제인형, 박제동물들을 도살장 고기처럼 천장에 걸어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설치 모습에서 소녀와 마녀의 감성 사이를 오가는 작가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지난해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시작된 이 순회 회고전은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기한 길을 걸은 메사제 작품세계의 흐름을 두루 정리하고 있다. 서구 대가들 전시는 몇 개 더 있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화랑은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이우환, 로만 오팔카, 주제페 페노네, 귄터 워커의 3인전 ‘센시티브 시스템’전(25일까지, 02-720-1524~6)을, 청담동 박여숙 화랑은 거대공간을 화폭 삼아 작업하는 대지미술의 작가 크리스토의 드로잉 소품전(22일까지, 02-549-7574)을 하고 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는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론 아라드의 의자 작품전(4월20일까지)을 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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