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잡지 가 ‘짝퉁’ 의혹 제기한 박수근 , 진품 판정 나기까지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보다시피 진품입니다! ”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의 심미성 이사는 단호한 말투로 코팅된 문서 하나를 추켜올렸다. 국민화가 박수근(1914~65)의 작품 (36.2×71.2cm) 사진이 붙은 진품 감정서였다. 감정서 앞에 몰려든 취재진들 사이에서 고성 속에 연방 사진 플래시가 터진다.
△‘짝퉁’ 의혹이 제기됐던 박수근의 그림 는 재감정 끝에 진품 판정을 다시 받는 곡절을 겪었다. 1월9일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 사무실에서 서울옥션 심미성 이사가 의 진품 감정서를 공개하고 있다. 그 앞에서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사진/한겨레 김경호 기자)
화랑주들 “언론이 괜히 선정 보도”
지난 1월9일 낮 서울 인사동 화랑가 건국빌딩 3층의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이하 연구소)는 기자들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림 의 진위를 판정, 발표하는 자리에 취재진만 이례적으로 60명 이상 몰렸다. 이 그림이 지난해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국내 최고값인 45억2천만원에 팔려나간데다, 연말 란 격주간 미술잡지 창간호가 그림의 ‘짝퉁’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실었기 때문이다. 일간지, 방송 등이 잇따라 잡지 내용을 받아 경매 최고가 미술품 진위 논란 식으로 보도했다. 는 삽시간에 ‘국민적 구설’에 올랐고, 서울옥션 쪽은 ‘최선을 다했다’고 밝힌 자신들의 진품 감정 결과를 물리고, 국내 유일의 감정전문 기구라는 연구소에 다시 감정을 의뢰했다. 화랑업주 10명, 미술계 인사 10명으로 짠 특별 감정단이 전례없이 꾸려졌다. 그리고 1월4일과 9일 비공개 감정을 한 뒤 대국민 선언하듯 진품 판정을 발표한 것이다.
감정위원들의 수장 격인 평론가 오광수씨는 흥분한 취재진 앞에서 감정소견서를 먼저 읽었다. 미국인 소장자가 한국에서 사업하던 50년대 중반 박수근에게 직접 주문해 그림을 받았다는 소장 경위를 확인했다고 했다. 박수근 특유의 표면 질감이 완성되기 이전 모색기의 작품으로 파악된다는 안목 감정 결과와, 적외선·엑스선 촬영 등을 통해 50년대 화폭임을 확인했다는 과학 감정 내용 등도 밝혔다. 감정위원 20명 가운데 1명만 빼고 모두 진짜로 판정했다고 했지만, 감정위원의 개별적 견해 등은 비공개라고 못박았다. 소더비 같은 외국 경매사들은 감정자 실명을 공개하지 않느냐고 한 기자가 따졌다. “소더비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신상이 공개되면 많은 이들에게 시달림을 받는다”는 말이 돌아왔다.
조선·중앙 보도 뒤 타 언론 받아써
새해 벽두의 논란은 부조리로 점철된 블랙코미디와 비슷하다. 논란의 씨앗을 뿌린 의 기사를 본 미술 동네 사람들은 글이 의혹의 근거가 부실한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신문, 방송기자들은 비싼 그림 스캔들이란 간판으로 잡지의 내용과 찬반 논란을 별 여과 없이 중계하는 데 바빴다. 진품이라고 확정 판결한 감정위원들은 모두 감정서 뒤에 자기 견해를 숨겼고, 화랑주들은 ‘무시해도 되는데 언론이 선정 보도했다’고 말하고 다닌다.
기실 짝퉁 논란이 확산된 건 지난해 12월31일치 와 에 ‘45억짜리 박수근의 그림 가 수상하다’ ‘45억2천만원짜리 그림이 가짜?’라는 제목을 각각 붙인 잡지 인용 기사들이 실리면서부터다. 이후 다른 신문, 방송들이 앞다퉈 ‘대한민국 최고가 그림이 짝퉁?’이란 제목으로 잡지에 실린 류병학 편집주간의 의혹 글을 받아 보도했다. 류 주간의 글은 낙찰된 가 95년 시공사에서 나온 박수근 작품집에 실린 와 비슷하지만, 물줄기의 선 묘사 등에서 수준이 떨어지며, 시공사의 비슷한 도판은 경매 당시 비교 대상으로 넣지 않았다는데 의혹을 제기했다. 또 지난해 5월 낙찰 뒤 경매사 쪽에 진위 공동 검증을 제안했던 문화유산지킴이 황평우씨의 인터뷰 내용 등도 근거로 포함됐다. 화랑업주와 감정전문가들은 류씨의 글이 공론화하기엔 격이 떨어진다는 반응이다. 원작을 본 감정 전문가의 분석이나 과학적 분석 결과가 근거로 나오지 않고 인상 비판 중심이기 때문이다. 시공사 발행 화집의 사진 도판도 원작이 아니다. 글을 쓴 류씨는 2006년 부산 비엔날레 바다미술제 감독을 지낸 기획자다. 독일을 오가면서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하고 리뷰 글을 써왔지만, 근대기의 작가론·작품론 등을 발표한 적은 없다.
서울옥션이 판정을 바탕으로 잡지사 쪽에 소송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뒤인 1월9일 저녁 언론사에는 ‘아트레이드의 입장’이란 이메일 문서가 전송됐다. 이메일에는 “아트레이드를 제외한 채 비공개 진행된 이번 감정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 제3의 감정 단체에서 아트레이드와 서울옥션의 협의 아래 감정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들어 있었다. 오광수씨는 “반론 근거가 확실하다면 논쟁할 수 있으나 감정서가 발급된 이상 재감정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도 “ 근대미술 감정 경험이 전혀 없는 류씨와 어떤 전문가가 함께 재감정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미술 동네에서는 이번 해프닝이 화랑가 유통 작품들에 대한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가 잇따르는 서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선무당 격의 진위 의혹에 대해 화랑가의 공식 감정 기구들이 ‘의연하게 맞설’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정을 주도해온 화랑업자들은 숱한 내분과 이권다툼, 오심 등으로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려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감정 주도권 싸움에 국가 개입 주장도
국내 미술품 감정 체계의 시초는 80년대 초반 시작한 한국화랑협회, 고미술협회 감정위원회다. 화랑협회의 경우 2002년 몇몇 전문가와 화랑주들이 한국미술품감정협회를 만들어 떨어져나가면서 내분이 심화됐다. 감정 기준, 안목 등을 놓고 대립한 두 단체는 2004년 근대작가 도상봉의 꽃그림에 대한 상반되는 진위 감정서를 내놓아 말썽을 빚었다. 2005년 이중섭 위작 파문도 서울옥션이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감정 결과를 무시한 채 유족과 출품을 강행한 데서 비롯됐다.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와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지난해 통합감정기구로 연구소를 구성했지만, 출범 한 달여 만에 원로작가 변시지의 을 작가 확인 없이 진품 판정했다가 작가의 위작 폭로로 망신을 샀다(연구소 쪽은 아직도 작품 진위 결론을 미루고 있다). 고미술협회는 감정위원이 돈을 받고 가짜 불상을 진품으로 판정한 사실이 최근 적발되기도 했다. 2006년 문화관광부의 3억원 예산 지원으로 미술품감정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시작했던 감정아카데미와 감정시스템 기반사업의 경우도 일부 전문가와 화랑주들 사이에 지원금 배분과 사업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빚어져 지난해부터 전면 중단됐다. 서울옥션의 경우 이중섭 파문 뒤에도 전통 불화 도난품의 출품, 변시지 작품의 위작 논란, 해공 신익희 글씨 위작 논란 등의 감정 악재가 잇따랐고, 최근엔 한 원로작가가 자기 작품으로 경매에 소개된 그림을 감정하다가 뒷면에 위작이라고 써넣는 엽기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논란은 작품 이권에 매몰된 화랑업자 중심 감정 체계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전문가들은 감정 체계의 개혁 동력을 상실한 화랑업자들이 앞으로도 감정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감정 체계 투명화를 위해서는 국가 기관 차원의 획기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이 근대 명작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693호), 주요 근대 미술 대가들의 경우 작품 감정수복 기능의 상당 부분을 국가 관리 아래 두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일본처럼 국책 문화재연구소의 근대 문화재 수복 연구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전문인 양성을 위한 국비 유학생 파견 등의 장기적 대책을 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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