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든 우정이든, 핵심은 ‘의리’인 곽경택 감독의 새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곽경택 감독의 은 단순한 부산 남자의 끈질긴 사랑 얘기다. 먼저 남자의 사랑. 의 성별은 남자다. 등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이다. 그리하여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봐도 이해할 영화”
곽경택의 은 부산의 사랑이다. 처럼 의 배경엔 바다가 있다. 욕설, 칼질, 양아치, 교도소. 곽경택은 의 ‘자갈치 하드보일드’로 돌아왔다. 그 세계에서 남자끼리 첫인사는 “한번 할래?”, 어른의 훈계는 “눈까리 안 까나”, 여성의 대명사는 “딸아” 혹은 “가쓰나”, 남성의 호칭은 “씨발놈아”, 형님에 대한 아부는 “아다라시 오랜만에 드시겠습니다”. 에서 보았던 낯설지 않은 거친 남자의 세계다. 때때로 우습고 때때로 애처로운 경상도 밑바닥 남자들은 하지만 끝끝내 불편하다. 그곳에 즐거운 우리 집은 없다. 거기선 ‘집구석’마저도 동물의 세계에 가깝다. 한 집 건너 집 나간 아버지가 있는 세계다. 본드에 찌든 아들이 자신을 태우고 도박에 미친 엄마를 죽인다. 그렇게 오빠와 엄마를 동시에 잃고도 미주의 마음 한켠은 후련한 세계다. 그래서 인호와 미주가 취해서 부르는 노래는 “엄마, 아빠도 함께 투게더~”, 그들에게 이상적인 가족은 광고에나 존재한다.
곽경택이 그리는 남자의 세계는 선악이 명확한 세계다. 비극은 선한 남자의 세상이 악한 남자의 침범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에선 ‘양아치’ 치곤(김민준)이 끼어든다. 선한 남자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치곤은 엄마의 노름빚을 핑계로 미주를 잡아간다. 미주를 겁탈한 치곤을 인호가 찌른다. 남자는 감옥에 갇힌다. 여자는 떠난다. 세월이 흐른다. 막노동을 전전하던 인호는 자신을 알아주는 남자를, 보스를 만난다. ‘남자 영화’에서 전형적인 청년을 이끄는 중년, 일종의 멘토와 멘티의 관계다. 인호는 그렇게 굴지의 건설사 유 회장(주현)의 오른팔이 된다. 역시나 또다시 남자가 모진 사랑의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의 우연, 세 번째 인연이 그들을 잇는다. 하지만 우연의 연속은 단순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곽경택 감독 스스로 배우들에게 “우리 영화는 아마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봐도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야기는 끊어진 직선으로, 예정된 방향으로 돌진한다. ‘사랑밖에 난 몰라’로 보이는 단순한 남자는 지독한 사랑을 밀어가는 힘이다. 인호는 뜻밖의 인연으로 나타난 미주를 보면서 울음을 참지만 사랑을 이기진 못한다. 인호와 미주는 눈물짓다가 머뭇거리다 결국엔 껴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위험한 사랑이 시작된다. 은 그들에게 회장님의 ‘분부’를 내세워 못다 한 연애를 다하게 만든다. 회장의 비서인 인호가 미주에게 살 집을 구해주고, 살림을 장만해주고, 튼튼한 차를 사주는 일종의 유사 연애다.
유오성·장동건처럼, 주진모·김민준도 해내
은 의 이성애 버전으로 보일 만큼 닮았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곽경택의 핵심은 의리다. 끝까지 지키는 의리가 없다면 사랑도, 우정도 아니다. 아니 사람도 아니다. 그것이 곽경택 세계의 첫 번째 법칙이다. 하지만 (당연히) 냉혹한 세계는 그들의 의리를 허락지 않는다. 남자는 주먹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고 애쓰지만 ‘다구리’로 달려드는 놈들을 당하진 못한다. 끝내 그는 쓰러진다. 그래서 남자의 세계는 비극적 세계다. 의 친구도, 의 태풍도 결국엔 죽었다. 이렇게 현실은 냉혹하고, 인간의 의리는 아련한 이상으로 남는다. 비장한 결말은 행복한 시작과 대비돼 증폭된다. 이 처럼 순진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이유다.
의 또 다른 이름은 주진모의 이다. 이 흥행에 성공할지 모르지만, 주진모는 으로 실패하지 않았다. 첫 번째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에서 주진모는 의 유오성이 해낸 것을 해낸다. 그는 배역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영화를 이끈다. 주진모는 남자답지만 마초스럽지 않다. 그래서 피 터지게 싸우거나 비열하게 협박하는 인호도, 한 여자를 위해서 울음을 삼키는 인호도 동시에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적역을 맡은 행운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잘 맞는 배역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연기하는 연기자가 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얼굴에 흉터를 새기고 나오는 김민준은 제대로 비열하다. 경상도 출신의 ‘네이티브 스피커’ 김민준은 부산 사투리를 ‘지대로’ 구사한다. 입이 풀리면서 몸도 풀렸는지, 김민준은 제대로 눈을 뒤집고 욕설을 뱉는다. 그렇게 상처받은 도회지 남성의 이미지를 단숨에 전복한다. 그렇게 그는 짧은 출연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 미남배우 장동건에게 주었던 것을 은 김민준에게 줄지도 모르겠다. 박시연도 어설픈 사투리를 뺀다면, 기대 이상의 연기를 해낸다. 물론 의 주체가 남성이라 여성인 미주를 연기할 여지가 많지는 않다. 여전히 에서도 여성 캐릭터는 과묵하거나 스쳐간다. 여자의 얼굴은 희미하다.
뻔한 얘기의 끝에도 코끝은 시큰
곽경택의 영화에는 어떠한 비판도, 아무런 찬양도 없는 풍속화가 존재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70년대 혹은 80년대, 지나온 시절의 학교 풍경은 아무런 판단의 맥락이 없는, 풍경화로 재현된다. 권위주의가 나빴다, 아니면 그립다, 어느 쪽도 아니다. 그때의 교실 풍경은 원형질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여기에 등에서 보여준 밑바닥 남자의 단순함을 유머의 코드로 활용하는 재치도 여전하다. 은 제목만큼 단순한 영화다. 너무나 단순해서 다음에 이렇게 되겠지 혹은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 하면, 이렇게 되는 영화다. 하지만 뻔한 얘기의 끝에도 예기치 않게 코끝은 시큰하다. 혹은 사랑은 그렇게 힘이 세다. 조명에 공을 들였다는 감독의 말처럼 ‘화면발’이 단순한 남자의 사랑에 쓸쓸한 정서를 더한다. 9월20일 개봉하는 은 ‘웰메이드’ 트로트 가요를 듣고서 눈물이 핑 도는 순간과 비슷한 느낌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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