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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주말 드라마, 퇴행은 언제까지?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경쟁하듯 엉터리 엔딩 쏟아내는 드라마들 속에서 ‘가족’에 갇힌 여성들</font>

▣ 강명석 기획위원

과거에 자신이 낳은 아들을 키운 여자가 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암으로 죽을 상황이니 자신의 남편과 결혼해 아이 엄마가 되라고 한다. 이 여자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해야 하나. 이게 대체 무슨 ‘꼬고 또 꼬는’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답부터 얘기하자면, 그냥 “예”다. 문화방송 에서 문희(강수연)가 낳자마자 버렸던 아들 하늘이를 키워왔던 한나(김해숙)는 자신이 암에 걸리자 문희에게 자신의 남편 영철(박상면)과 결혼해 하늘이 엄마가 돼달라고 주장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 유진(조연우)과의 결혼을 앞둔 문희는 ‘정말로’ 한나의 제의를 고민하더니 한나가 죽자 유진과 결별하고 영철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며 드라마가 끝났다.

여자의 과거·남자의 불륜은 공포?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 종영한 다른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들은 마치 경쟁하듯 엉터리 엔딩을 쏟아냈다. 문화방송 는 6년 동안 불륜을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자식까지 낳고, 가정을 파탄내면서까지 함께 살겠다고 하던 건우(이재룡)와 서경(성현아)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각자의 배우자인 세영(최진실)과 태현(전노민)에게 돌아가는 결말로 마무리됐다. 또 한국방송 는 주인공 지연(윤정희)이 불륜을 저지른 남편 준호(정겨운)와 이혼한 뒤 새로운 남자 태섭(김석훈)과 사랑에 빠지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준호의 호소로 준호에게 돌아갔다가 형사인 태섭이 큰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황당한 엔딩을 보여주기도 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전개지만 는 방영 내내 10% 중반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는 마지막 회에서 무려 31.7%의 시청률(TNS미디어코리아 기준)을 기록했다.

이런 억지스러운 엔딩은 최근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에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퇴행의 결과물이다. 세 작품은 어디로 튈지 모를 비상식적인 전개를 하는 듯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세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의 불행은 자신의 과거나 배우자의 불륜에 의해 시작되고, 그들이 처한 불행의 끝은 가부장제 중심의 가정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문희는 미혼모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문 회장의 가정에서 쫓겨날 상황이고, 세영과 지연은 남편의 불륜 때문에 가정이 파탄나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경제권은 남자가 쥐고 있고, 그 남자와 살지 못하는 여자는 곧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문희처럼 여자의 과거는 그 자신의 발목을 잡지만, 남자의 불륜은 오히려 여자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서경처럼 불륜을 저지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말 그대로 ‘나쁜 여자’다. 여자가 남자가 만든 가정에서 배제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공포는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의 주시청자층인 중년 시청자의 정서를 자극한다. 상황 자체는 비현실적이지만, 가정이 파탄나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의 모습은 중년 여성 시청자에게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시무시한 스릴과 서스펜스다. 그러나 이 공포는 끝까지 공포로 마무리되지 못한다. 여자가 가정을 벗어나면 ‘불행한 여자’가 되는 상황에서 여성이 기존의 가정을 배제한 채 새로운 가족을 만들거나, 가부장제의 가정에서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은 그사이 시청률을 올리느라 여주인공을 실컷 괴롭혔으니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문희와 유진이 결혼하는 것이 옳겠지만 ‘과거’ 있는 여자가 자기 자식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영철과 결혼이라도 시켜서 ‘아내’이자 ‘엄마’로 만들어야 하고, 세영과 서경은 과정이야 어떻든 각자의 남편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마치 속편이 있는 것처럼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는 중년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이들 드라마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개상으로는 지영이 자신은 물론 딸까지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태섭과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는 남편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과거 드라마의 사고방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태섭과 준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끝날 수밖에 없다. 강수연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초반 몇 회를 제외한 의 초·중반 시청률이 한 자릿수에 머물다가 후반에 이르러 마지막 회 시청률이 15.1%를 기록할 정도로 상승세를 보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과거 있는 여자라는 설정이나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문 회장의 가정 묘사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초반의 는 그런 과거와 가정 분위기를 딛고 일과 사랑에서 모두 승리하는 야심만만한 여자 문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청자는 ‘과거’를 딛고 남자들처럼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여성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희는 어느 순간부터 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여자가 되기 시작했다. 젊은 시청자가 같은 미국 드라마나 등 ‘마니아 드라마’로 일컫는 그들의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이, 중년 시청자는 그들이 과거부터 즐겨보던 요소들이 모두 강하게 결집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불륜은 물론 아내에게 폭행과 사기까지 저질러도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결국 행복한 가정의 재결합으로 마무리됐던 과 온갖 엽기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모성’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하던 가 퇴행의 시작이었다면, 의 임성한 작가가 집필한 문화방송 이 매일 방영되고, 와 가 주말에 방송된 요즘은 그 절정에 있는 셈이다.

‘가정’ 깬 김수현 작가, 그래서 대단해

그 점에서 김수현 작가는 여전히 대단하다. 김수현 작가는 월화 미니시리즈 시간대에 SBS 를 선보이면서 불륜으로 가부장제 중심의 가족이 해체되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신뢰가 깨졌을 때 여성이 ‘비겁한’ 남자를 떠나 독립할 수 있음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도록 그려냈다. 지금 중년 시청자 중심의 드라마에 필요한 것은 익숙한 설정을 사용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는 반보 앞선 자세일지도 모른다. 물론 시청자는 각자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봐야 한다. 하지만 왜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에서는 늘 여자들이 무조건 ‘가정’으로 가는 것이 행복한 결말이 돼야 하는가. 이제는 여자가 그냥 ‘여자’로 행복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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