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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도 지옥이요, 사랑받아도 지옥이요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17세기 에도시대 유곽의 여성을 통해 사랑을 말하는 일본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울면 지는 거다. 사랑해도 지는 거다. 이겨도 지는 거다!”

억울해도 울지 말아야 한다. 사랑 따위는 필요 없어, 그렇게 마음을 속여야 산다. 그렇게 살아야 겨우 살지만, 그렇게 살아도 결국엔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게이샤 혹은 오이란의 운명이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동료의 시기에 시달리는 게이샤 키요하(쓰치야 안나)에게 세이지(안도 마사노부)는 그렇게 말한다. 일본 영화 은 17세기 에도시대 배경을, 유곽의 여성이라는 신분을 빌려오지만 결국엔 사랑을 말한다. 그러니까 은 사랑에 빠지기 쉽지만 사랑을 얻기는 어려운 사람들, 그래서 “사랑해도 지옥이요, 사랑받아도 지옥이요”인 이들을 그리는 풍속화다.

그 옛날 유곽의 여성들에게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작업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여성을 집안에 가둬두었던 근대 이전에, 기생이나 게이샤는 자유연애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여성들이었다. 안노 모요코의 인기만화가 원작인 도 이렇게 사랑을 파는 대신에 연애의 가능성을 얻는, 역설적 존재를 전제하고 들어간다. 8살 꼬마가 요시와라 유곽에 팔려간다. 당돌한 꼬마는 자신의 운명을 쉽사리 수긍하지 않는다. 조숙한 꼬마는 유곽에 들어가 게이샤들의 젖무덤을 보면서 젖무덤 같은 유곽에 파묻힐 운명을 예감하고 유곽에서 도망친다. 결국에 잡혀오지만, “(수십 년째 피지 않았던 나무의) 벚꽂이 피면 제 발로 나간다”는 맹세를 가슴에 새긴다. 키요하라는 이름이 붙은 꼬마는 17살 숙녀로 자라난다. 여전히 당돌한 그는 유곽의 운명을 수긍하지 못하듯 사랑도 포기하지 않는다. 키요하는 손님으로 찾아온 잘생긴 청년 소우지로(나리미야 히로키)를 사랑하지만, 머잖아 자신이 품었던 사랑이 환상임을 깨닫는다. 그토록 그리워 찾아간 ‘그분’이 “웃는 도깨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되기를 거부했던 오이란의 자리에 오른다.

안노 모요코의 인기만화가 원작

요시하라 유곽을 대표하는 게이샤인 오이란은 선망의 자리이자 질시의 대상이다. 뭇 남성들은 오이란을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만, 그들이 오이란을 사랑할수록 오이란을 둘러싼 질시도 심해지는 운명이다. 게이샤 키요하에서 오이란 히라구시로 신분도 이름도 바뀌었지만 그의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타고난 미모에 도도한 성격도 겸비한 그에게 무사와 회장, ‘사마’들이 잇따라 구애를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오이란은 비록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었지만, 이처럼 동침할 상대를 선택할 권리도 있었다. “천명의 평민, 백명의 손님, 열명의 고객 그리고 하나의 연인.” 당시의 요시와라 유곽에서 나왔다는 이 말은 정확히 오이란 히라구시의 마음과 처지를 대변한다. 그는 끝끝내 하나의 연인을, 낭만적 사랑을 꿈꾼다.

눈을 찌를 듯한 원색에 과감한 록음악

결국엔 사랑을 말하지만, 끝까지 눈에 남는 것은 화려한 색감이다. 원색의 향연을 빼놓고 을 말하긴 어렵다. 눈을 찌를 듯한 원색이 인물이 입은 기모노에 벽에 그린 그림에 넘쳐난다. 여기에 기모노의 매혹적인 선과 건물의 단아한 구조가 어울리고, 분홍의 벚꽂이 흐드러진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색깔의 향연은 영화에 화려한 느낌과 함께 기묘한 인공미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이 때때로 현실이 아닌 듯한 착란이 든다(사쿠란은 착란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은 전통미를 살렸던 한국 영화보다 색깔의 사용에 과감하다. 일부러 감청색 위주로 색깔을 ‘눌러’주었던 는 물론 은은한 원색의 향연이 향기로웠던 에 견줘도 훨씬 화려한 원색이 영화에 춤춘다. 이렇게 원색이 눈을 찌르지만, 아름다움에 눈이 멀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비슷한 느낌의 사진만 계속 나오는 사진집을 두 시간 가까이 보았다는, 과잉된 이미지의 느낌이 남는다. 이렇게 각각의 장면은 매혹적이지만, 영화 전체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단일하다는 느낌은 의 감독이 사진작가 출신 니나가와 미카라는 사실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과감한 음악은 반복되는 이미지에 리듬을 불어넣는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나오는 17세기 배경의 영화인 에 과감하게 록음악이 깔린다. 때때로 흐느끼고, 가끔은 질주하는 팝은 전통적인 일본을 담은 화면과 충돌하기보다는 어울린다. 아니 충돌하면서 어울린다. 나아가 은 키요하의 성장 과정을 뮤직비디오의 리듬으로 압축해 담기도 한다. 은 감독·원작자·각본가 등을 모두 여성이 맡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영화다. 음악도 ‘동경사변’ 밴드로 유명한 여성음악가 시이나 링고가 맡았다. 의 주연을 맡은 청춘배우들의 연기도 빼어나다. 가수로도 유명한 쓰치야 안나는 에서 남자 같은 폭주족 소녀를 연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여성미를 선보인다.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키요하를 더욱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에 나왔던 안도 마사노부를 에서 알아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단순히 안도 마사노부가 세이지 역할을 위해서 일본 전통 머리 모양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만큼 인물에 녹아든 그들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떠오르는 청춘스타 나리미야 히로키 등 아름다운 배우들의 출연은 의 또 다른 볼거리다. 9월6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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