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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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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섀도우>가 드리운 그림자

등록 2007-07-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서구 제작진의 기술로 봉합과 위장의 창작 뮤지컬을 만들었나

▣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

올해 국내 창작 뮤지컬에서 손꼽혔던 기대작 이 잠시 ‘수정 보완’ 과정을 거치는 사이, 또 다른 기대작이 화려한 자태로 대중 앞에 나왔다. 지난 7월8일부터 국내외 일류 장인과 배우들이 진초록 이미지로 상징화한 대작 (8월1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가 공연을 시작한 것이다.

뮤지컬 동네의 사정은 이제 전 시대와 다르다. ‘최고 기대작’이 되려면 100억원대 가까운 거대 자본의 투입, 주류 언론사의 후원, 다년간의 준비, 원작의 유명세 같은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2000년대 들어 급성장해온 국내 뮤지컬 시장은 ‘무한경쟁’이란 자가 발전소를 두고 스스로 운동하면서 이런 ‘거대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일단 이 요건들을 갖추면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듯한 ‘시뮬라시옹’ 같은 지금 상황은 창작 뮤지컬의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신시뮤지컬컴퍼니(이하 신시)의 와 보완 작업 중인 피엠시(PMC)의 은 그런 맥락에서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인기작 의 뒤를 잇는 ‘포스트 명성황후’를 욕망하는 기제인 셈이다.

‘일단 올리고 보기’ 못 벗어나

그리 유쾌하지 못한 의 성적표를 받아든 뮤지컬 동네는 반신반의하며 의 개막을 기다려왔다. 그 반신반의의 심정은 기실 원작이 된 차범석의 연극 을 서구 예술 대가들로 구성된 제작진(극본 아리엘 도르프만, 음악 에릭 울프슨, 연출 폴 게링턴)이 어떻게 재탄생시킬 것인가란 ‘우려 섞인’ 기대감에 집중됐다. 세계 시장에서 검증된 인력을 대거 투입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이면에 외국 제작진이 원작 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교감할 수 있었을까란 의심이 서려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의 외국 제작진을 앞세운 의 선전 문구들은 서구 라이선스 뮤지컬들의 존재감에 주눅들기 일쑤인 문화적 약자의 땅에서 비교적 손쉽게 공신력을 얻었다. 그리고 작품 제작의 근거와 명분들 또한 곧장 ‘세계화’(글로벌리즘)로 확장시켰다. 이는 작품에 대한 대중의 의심이 빨리 기화해 날아가기를 원하는 제작진의 욕망을 은밀하게 비춰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선전 문구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는 무엇보다 ‘봉합과 위장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뜯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미처 정리되지 못한 무대와, 다른 하나는 ‘보편성’을 구체화하는 방식과 연관된 것이었다.

사실 는 현 창작 뮤지컬의 관습처럼 굳어진 ‘일단 올리고 보기’ 전략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획력이 콘텐츠를 압도하는 국내 창작 뮤지컬 동네의 고질병을 여실히 반영한다. 화려한 겉포장은 종종 빈약한 콘텐츠를 위장한다. 공연이 실제 무대와 완전히 육화하지 못했는데도, 무리한 기획에 휩쓸려 설익은 상태로 올리는 것을 가려주는 구실도 했다. 이런 단면들은 ‘프리 프로덕션 과정’으로 부르는 ‘트라이아웃(try-out)’ 공연(중앙 무대 개막 전에 지방을 돌며 작품을 검증받는 시스템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나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무대의 경우 이 과정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오면 작품을 삭제하기도 한다)이나 프리뷰, 언론시사회(press night) 등의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제도적 허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문제였던 것은 이러한 제도 이전의 관행과 관련한 부분들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공연을 무리하게 올린 뒤 ‘수정 보완’을 하겠다고 외치는 제작사들의 행태는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막바지 공연 기간 때 관객은 프리뷰 공연이나 개막 즈음의 공연과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는 행운(?)을 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인 콘스탄자 산골 마을의 두 여인 나쉬탈라(김보경)와 신다(배해선), 그리고 탈주병 솔로몬(신성록) 사이에 형성된 개연성 없는 기이한 삼각관계는 대폭 수정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또 신다의 어머니 마마 아스터(김성녀)와 숲을 태우려는 태양군 대령(성기윤)의 근거 없는 캐릭터 변화에는 기본적 일관성을 부여하는 고려가 요구될 수도 있다. 는 이처럼 개연성과 일관성을 잃고 부유하는 서사의 틈새를,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뮤지컬의 장르적 관습을 도용해 봉합하기에 바빴다. 예를 들어 나쉬탈라와 사랑을 나눈 뒤, 들끓는 욕정에 사로잡힌 신다의 육탄 공세에 갈등하던 솔로몬은 “이번 한 번만이야”를 외치며 간단히 신다를 받아들인다. 이 어이없는 장면은, 곧바로 폴카를 추는 마을 아낙들과 군인들의 집단적인 춤으로 서둘러 봉합되는데, 이때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관객의 실소는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스펙터클에 바로 묻히고 만다.

추상화한 전쟁 안에 대충 버무린 인간관계

사실, 이러한 위장된 무대는 좀더 근본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이념 대립을 배경으로 한 을 서구 제작진의 기술로 보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시의 시도가 맹목적이란 점을 증명한다. ‘창작 뮤지컬 수출’이라는 패러다임 탄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의 역사적 맥락을 탈각시키고 대자연의 신비, 생명력 등을 화두로 텍스트를 탈역사화한 것은, 글로벌 시대에 세계 전체를 잠재시장으로 상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국전쟁기 소백산맥 자락의 한 마을에 국군과 빨치산 부대가 밤낮으로 출몰해 극적인 대립 상황을 연출하던 의 긴장감은 에서 희박해졌다. 콘스탄자 마을이란 추상화된 공간 속에서 ‘태양군은 사나이! 달군은 가시나!’라는 구호로 호명되는 설득력 없는 내전 구도에 따라 완전히 무화하고 만 듯한 느낌이다.

극을 이끄는 세 주인공의 삼각관계는 추상화된 전쟁 안에서 대충 버무려졌다. 이 삼각관계는 처음부터 ‘숲’의 훼손을 걱정하던 나쉬탈라와 전쟁의 허무함을 주장하는 솔로몬의 울림 안에 포섭돼 전혀 극적인 재미를 주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으나 생명의 소중함을 육체에 아로새겨진 기억으로 보존할 것을 다짐하는 신다는 스스로 문제적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 뜬금없는 설교로 신다의 결심을 이끌어내는 마마 아스터, 불타 죽은 뒤 자연의 신처럼 부활한 나쉬탈라와 솔로몬이 다시 등장하는 결말은, 의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우리 역사를 자연과 생명을 매개로 하는 추상적·보편적 휴머니즘으로 대치하려 했던 것이다.

서구 뮤지컬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

의 순수한 보편성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탈리아 파시즘을 연상시키는 마을 아낙들의 의상과 무너진 고대 그리스 신전을 상기시키는 무대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한 서구적 시각을 보편성의 관념으로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 는 서구 뮤지컬에 대한 우리의 콤플렉스를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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