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가볍게 떠나볼까, 후쿠오카 역사기행

등록 2007-06-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주말동안 만만하게 다녀와볼만한 일본 후쿠오카의 역사문화 공간을 찾아

▣ 하카타=글·사진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라면, 포장마차, 쇼핑 천국…. 가장 가까운 일본 도시 후쿠오카는 한국에서 가장 만만한 해외 관광지다. 대개 편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곳으로 여긴다. 볼거리 천지라는 종합 위락공간 채널시티, 도쿄 뺨친다는 텐진 번화가, 불야성의 환락가 나카스, 해양공원 마리노아 등이 그렇다. 수십만 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 도시는 기실 한반도 고대사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는 고도이자 문화도시다. 백제 멸망 이후 정립된 다자이후라는 지방정권의 영향력 아래 커왔다. 백제 멸망, 신라·고려 상인들의 원양 교역,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빼놓고 후쿠오카를 이야기할 수 없다. 은 지난 6월1~3일 불교미술사학회 회원들과 함께 2박3일짜리 일본 후쿠오카 역사문화 기행을 다녀왔다. 1년여 전 개관한 규슈국립박물관 기획전과 다자이후 정청터 답사를 겨냥한 프로그램이었다. 주말 토·일요일을 채운 한·중·일 고대 문화교류사 기행을 KTX 열차와 배, 버스로만 따라가보았다.

역사가 흐른다, 박물관이 흐른다

우주선이야? 규슈국립박물관은 흐르는 물 같은 유연한 외모가 특징이다. 울창한 일본 특유의 히노키(삼나무)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채 4층 높이에 측면만 200m 가까운 블루톤 유리와 철골로 만든 건축 덩어리다. 그 안에 3층 특별전실, 4층 상설전 공간이 깃들여 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상인, 문인, 외교관들이 나누었던 교류의 산물들이 줄줄이 자리를 지킨다. 내부는 편안한 나무 마감. 현대적 외관과 전통적인 내관의 절묘한 조화다.

최고 36.1m 높이의 대형 투명창 외관 철골 뼈대 안에 4층까지 전시실, 수장고, 각종 편의시설이 치밀하게 둘러앉았다. 아시아 교류사의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를 본다는 콘셉트에 맞춘 상설실 전시도 좋지만, 일반 관객에게는 1층의 다양한 관객 편의시설이 눈길을 끈다. 아이들과 같이 편하게 구경할 수 있는 눈높이 민속유물 재현품을 설치한 아지파룸은 그 안에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의 민속품들과 퍼즐조각, 그림책 등이 비치되어 있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역사 문화재 공부를 할 수 있다. 한국 도자기는 상설전 문화교류 전시실에 별도의 특별 전시 코너가 딸려 있다. 6월10일 끝난 특별전은 중국의 태산석경과 정토불교 미술이 주제다. 석벽에 불경을 새긴 중국의 유명한 태산석경, 베이징 방산석경 등의 돌새김 경전 신앙 행태가 일본에 영향을 미쳐, 말세에 불경을 고급스러운 금속통에 넣은 뒤 묻는 불경무덤(경총)을 만드는 말법 신앙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학술 전시다. 고려의 감지금자 묘법연화경 등 고려인들이 정성껏 금글씨로 베낀 불경 필사경도 있다. 후쿠오카에서 나왔다는 한 경총 안에는 정교하고 날씬한 통일신라시대 불상도 들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국 도자기 전시 특별실과 중국 도자 컬렉션에서는 우리 청자와 중국의 웨저우요(월주요) 자기류들이 빛난다. 전체적으로 블랙톤을 유지하면서도 편안한 무덤 속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도록 특정 부위에만 집약하는 은은한 조명 등이 우주선, 어두운 오두막 속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일본말을 전혀 몰라도 관람에 거의 지장이 없다. 일본인 도슨트들이 전시 동선, 전시품을 알아서 설명하며, 상설실에는 무료로 한국어 설명기를 귀에 달아준다. 터치패드로 손만 툭툭 치면 규슈 전 지역의 주요 발굴 기관, 박물관, 미술관의 현황 정보 파악이 가능한 컴퓨터 화상 안내 서비스, 외국인 관객에게 먼저 말을 걸고 설명을 거듭하는 도슨트, 항상 준비되어 있는 메모지와 간이 연필 등이 인상적이다.

‘다자이후’에 서니 인생무상, 역사무상

규슈국립박물관에서 다자이후 덴만구를 거쳐 다자이후 정청터로 간다. 일본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국민관광지인 덴만구는 헤이안시대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던 대재상 스기와라노 미치자네의 신사다. 대부분의 여행 정보지, 인터넷 등에서 후쿠오카 역사기행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한다. 재밌긴 한데 시장바닥처럼 붐비고 복잡하다. 열심히 입시 합격이나 승진을 기원하니 따라서 기원한다는 것 외에 그다지 큰 감흥은 없다. 마침 덴만구 정문으로 하오리하카마를 입은 신랑과 큰 수건을 둥글게 만들어 모자로 쓴 전통예복의 신부가 하객들과 함께 행진을 하고 있다. 시테쓰 다자이후역을 거쳐 다자이후 정청터로 터덜터덜 간다. 도보로도 좋고 자전거로도 좋다. 1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좀 궁상맞다. 이곳 명물인 매화 모치떡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다자이후 정청터까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역사 산책로를 걸어가거나,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도 괜찮다.

다자이후 정청으로 가기 직전 만나는 절이 한적한 간제온지(관세음사)다. 규슈의 중심사원으로 부(부)의 대사라고 부르던 곳으로 746년 완성됐다. 특히 중심 전각인 관세음지의 불단 앞에 작은 탁자가 놓이고 맨바닥을 취한 형태는 고려 말 우리 사찰의 양식과 얼개가 거의 일치한다고 불교미술사 연구자 이승희(홍익대 박사과정)씨는 말한다. 사이메이 천황을 추모해 세운 절이나 이후 다자이후를 찾은 외교사절과 상인들이 항해와 거래, 외교의 안전을 기원하며 절절한 불공을 올렸던 장소다. 1천여 년 전 신라와 고려 상인들이 안전 항해와 장사 대박을 기원하면서 기도를 올린 곳이며, 그 뒤에는 이곳에 쳐들어온 고려·몽골 연합군을 무찔러 나라를 지키게 해달라는 일본 무사들의 발원이 이어졌을 것이다.

다시 동쪽으로 걸어서 5분. 규슈 답사의 핵심이자 특별국가사적인 다자이후 관청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머니 품 같은 배후의 시오지야마(사왕사산)에 둘러싸인 다자이후 정청터는 그 출발과 운영 과정에서 우리 민족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규슈와 서부 쪽 섬들을 다스리던 지방 통치기관이자 대외 외교·무역 업무를 전담했던 관청으로 ‘서쪽의 조정’ ‘제2의 조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세를 자랑했다. 이 관청의 성립이 백제 멸망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나카노오에 태자(훗날 덴지 천황)가 2만5천여 명의 지원군을 결성해 금강으로 출진하지만 대패를 당하고 쫓겨온다. 이 패배 뒤 일본 서부 통치 방위의 거점이자 무역교류의 창구로서 주변에 방어성을 쌓으며 세워진 것이 바로 다자이후다.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759년에는 일본 조정 실력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명령으로 신라 침공을 준비하기도 했던 내력이 있다. 남문, 중문, 후전, 그리고 몇몇 대칭형의 딸림 건물 등으로 구성된 관청터에는 도쿠가와막부 시절과 메이지 천황 시절 세운 도독부 등의 자연석 표석이 3개만 서 있을 뿐이다. 중국, 한반도 고급 문화가 들어오는 유행의 첨단 지대였지만, 13세기 몽골·고려 연합군의 침공이나 백제 구원군 파견 당시에는 어김없는 최전방 군사본부의 구실을 했다. 절박한 과거사와 현재의 전경은 너무나 다르다. 주변 숲 속은 까마귀와 개구리 소리로 요란하고, 중문 지나 표지석 부근의 느티나무 아래서는 소풍나온 미시 엄마와 아이들이 벤토(도시락)를 까먹은 뒤 다정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다. 그 아래 자료관에 가니, 칠순에 가까운 자원봉사자 나카무라가 “다자이후 유적은 백제, 신라와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닌 유적”이라며 신라 황룡사터의 귀면와와 거의 똑같은 진열창의 귀신무늬 기와를 가리켰다.

“한국인 무관심에 유적도 서운할 듯”

후쿠오카 오호리 공원 들머리, 그곳에 20여 년 전 동아시아 고고역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곳 평화대 야구장 터 외야 쪽을 다지다 보니 여기가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상인과 거래하는 객사 건물터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놀랍게도 기와와 중국제 도자기편, 고려청자, 이슬람 아바스왕조의 도자기 등 다국적 유물들이 숱하게 나왔다. 물론 토양에서 기생충이 득시글거리는 대형 변소터, 이른바 ‘똥막대’로 불리는 휴지 대용으로 썼던 나무 막대(비슷한 똥막대가 3~4년 전 전북 익산 왕궁리 백제 궁터에서 발견됐다. 그렇다면 똥막대도 백제에서 일본에서 건너간 문물일까?)도 나왔다. 고로칸은 등 숱한 문헌에 존재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곳에서 신라 상인들의 국제적 교역이 유례없이 번창했다는 점과 그 배후에 있는 ‘해신’ 장보고의 존재다. 당시 당과 신라, 일본을 오가며 막대한 규모의 해상무역을 독점했던 장보고 선단의 최대 무역거점 중 하나가 바로 하카타의 고로칸이었다. 파견한 신라 상인단은 회역사라고 불렀는데, 신라 조정과는 별도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해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려고까지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예 장보고가 청해진을 정립하기 전 중국에서 이곳 고로칸으로 와서 머물렀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건 보호 건물에 둘러싸인 유적들과 기물들을 신라 상인과 외교사절들은 노독을 풀며 이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한-일 교류사에 중요한 유적이지만, 정식 여행 코스에서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고, 심지어 일본 출입이 잦은 미술사 문화재 연구자들도 고로칸 유적을 그냥 지나치기 일쑤라고 한다. 차순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은 “한국인의 무관심에 유적도 서운해할 것 같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후쿠오카시 박물관. 실크로드를 뒤흔든 페르시아, 파르티아, 사산조의 황금 유물과 신상 등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이란 지역 국보전(6월24일까지)이 열리고 있었다. 고로칸 유물과 다자이후, 하카타 생활유적, 조선과의 교류 유물 등을 담은 상설전도 관람 필수다.

부산항의 별빛 야경은 덤

답사팀은 금요일 오후 3시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 열차를 탔다. 오후 6시 전에 부산역에 도착해 택시로 인근 국제여객터미널로 간 뒤 곧장 입국수속해 오후 7시쯤 카멜리아호에 승선하고 배 안에서 1박한 뒤 다음날 아침 하카타에 도착했다. 시간적 여유와 부산항의 별빛 야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토요일 오전 일찍 출발해도 다자이후 규슈국립박물관 등의 역사 탐방은 충분하다. KTX로 새벽 5시25분 서울을 출발하면 8시28분 부산에 도착해, 9시30분에 출발하는 비틀을 탈 수 있다. 도착은 12시25분이니까 오후 반나절 돌아보기에 충분하다. 하카타 터미널에서 택시나 버스 편으로 니시테쓰 후쿠오카역으로 곧장 가서 니시테쓰 오무라선을 탄다. 후쓰가이치역에서 니시테쓰 다자이후선으로 갈아탄 뒤 종점 다자이후역에서 내리면 된다. 조용하면서도 고풍스런 다자이후 근교의 게스트하우스, 후쓰카이치역 근처의 료칸 등에서 자는 것도 괜찮다. 여행 비용은 카멜리아호를 이용한 2박3일 프로그램의 경우 개인 경비를 제하고 25만~35만원 정도다.(문의 여행박사 1588-5780, www.tourbaksa.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